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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 (히 11:32,33, 삿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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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삼손에 관한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눈을 뽑힌 삼손이 거대한 다곤의 신전을 두 팔로 기둥을 밀어서 무너뜨리는 신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는 고등학생 때 지녔던 흥분된 감정과는 정 반대의 감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흥분된 감정이 아닌 서글픈 감정이었습니다.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는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라는 인물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삼손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태아 교육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13:3,4). 태어날 때부터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장성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고 그래서 큰 힘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아주 큰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특제품으로 사사로 만들어진 강한 사람 삼손이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천방지축의’ 삶을 살았습니다. ‘못 말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 그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제품으로 만들어 주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고, 특별한 은사까지 부여해주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절제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은사들만을 믿고,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대단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내세우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은 무절제한, 물욕과 정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서글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서글퍼 하는 대상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태어날 때부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고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똥 배짱을 지니고,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살아가는 서글픈 인간이 삼손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저는 삼중적인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인간인 삼손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모순되는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가장 슬픈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은혜로운 설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서글픈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저 서글픈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기 위해 딤나로 내려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삿14:1,2). 삼손의 부모가 삼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삿14:3a) 그러나 삼손은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삿13:3b)

  4절의 말씀이 마치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 말씀이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았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 이른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 이라고 함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율법의 말씀도 무시해가시면서 필요한 일을 성립시킨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인 삼손이 이방 여자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함이다. 그가 끝까지 그 여자를 취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계기로 하여 그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경륜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사건도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다. 나실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하는 것은 나실인의 법도 범함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당장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로 참으시며 그를 사용하셨다.”(박윤선 목사). 결국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행동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옳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잔치를 베푸는 동안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옷 30별을 그들에게 줄 것이고 풀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옷 30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알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꼬이고 협박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라고 했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울면서 삼손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애걸했고 결국 삼손은 그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제 7일 되는 날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와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추었습니다. 삼손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아내를 협박하고 꼬여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춘 것을 알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스글론이란 곳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그들의 옷 30벌을 빼앗아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방지축의 삼손을 버리시지 않고 자기의 신을 그에게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저 자만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화를 내면서, 아내를 버리고 아비 집으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준 것을 알고는 다시 화가 나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불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 살라버렸다고 했습니다. 후에는 자기를 잡으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는 불레셋 사람들을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쳐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삼손을 불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삼손은 인격도 없고 신앙인의 모습도 지니지 못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을 계속해서 삼손에게 부어주셨고 삼손에게 마실 물까지 솟아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둘째,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에게 들어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강한 사람 삼손은 정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한, 천방지축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이 기생의 집에 들어가면서 아마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도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으니 자기도 얼마든지 기생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고, 삼손이 기생 집에 들어간 것은 기생과 하룻 밤을 즐기려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절제하게 행동한 못 말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삼손이 가사에 와서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사의 불레셋 사람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그리고 성문에 사람들을 매복해서 밤새도록 지키다가 새벽에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 중에 일어나서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산 꼭대기까지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밤중에 일어나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말리는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삼손과 같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부도덕한 행동을 뻔뻔하게 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강함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자랑하면서,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부끄러운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탄식할 일이고 슬퍼할 일입니다.

  셋째, 삼손이 소렉 골자기로 가서 들릴라 라는 여인을 사랑한 이야기 입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자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은 육체의 사람이었고 정욕의 사람이었습니다. 들릴라는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몸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기고 정신도 빼앗기고 영혼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들리라의 네 번에 걸친 애걸과 애교에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예쁜 여자를 믿을 수도 없고 힘센 남자를 믿을 수도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실감합니다. “삼손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았으며 어떻게 하면 삼손을 결박할 수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애걸을 하는 예쁜 여자 들리라에게 삼손은 세 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찍어 너머지지 않는 장사가 없다는 말대로 삼손은 네 번째 애걸에 너머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큰 힘이 자기 머리 털에 있다는 비밀을 들릴라에게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삼손이 들릴라에게 그 비밀을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그리고는 예쁜 여자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단 잠을 자다가 그만 머리 털을 밀리우고 말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의 신분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프고 가장 비극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오래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삼손을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그런 비극도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영적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슬프고도 비극적인 처지에 이르게 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큰 힘을 잃게 되었고 두 눈이 뽑혔고 놋줄로 매임을 당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불행과 슬픔과 비극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불레셋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었고 조소감이 되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에 모여서 다곤 신이 자기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면서 다곤 신에게 찬송을 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 삼손은 다곤 신전에 모인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 앞에서 재주까지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불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삿16:27).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삼손의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행동이 가져온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사사 “기드온의 이김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사사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가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삼손은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의 불행과 비극의 마지막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불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하나님께서 삼손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항상 귀를 기울이십니다. 삼손에게 다시 한 번 큰 힘을 부어주셨습니다. 집을 버티고 있던 두 기둥을 삼손은 두 손으로 밀어서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다곤의 거대한 신전이 무너져서 그 집안에 있던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이 모두 무너지는 집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삼손도 함께 깔려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불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동시에 정욕에 따라서 무절제하게 제 멋대로 살던 삼손에 대한 심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삼손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의 타락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만한 것이었다.” 물론 삼손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의 타락에 대한 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사의 사명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못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낸 사람은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삼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고서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무질서하게 제 멋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오늘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의 타락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을 바라보시고 슬퍼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도 얼마나 속상해 하시고 얼마나 슬퍼 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새벽마다 여러분들과 함께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는데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속상함과 서글픔과 탄식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너무 서글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며칠 전 제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서글픔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설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당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깨진 질그릇 같은 부족한 죄인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서글픔의 대상에서 기쁨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탄식의 대상에서 자랑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판의 대상에서 축복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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