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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받되 비판하지 말라 (롬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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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학교 다닐 때 한번은 교내 반별대항 야구대회가 있었는데, 체육시간을 이용하여 예선경기들을 하고 하루 날을 잡아서 학년별로 결승전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예선경기 하나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왔는데, 우리 반의 팀 주장 겸 투수인 친구와 또 한 명 잘하는 친구, 이 둘이서 갑자기 교단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날 시합은 간신히 이기기는 했지만 내용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두 친구가 앞에 나가더니 그날 경기에서 실수한 선수들부터 시작해서 좀 못하는 선수들까지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스윙을 그 따위로 해서는 안 돼!"라든지 "수비하면서 정신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라는 식의 아주 원색적인 비난이었습니다.
  어느 팀의 선수끼리라 해도 좀 더 잘하고 못하는 차이는 생기게 마련이고, 그래도 다 우리 반에서는 남보다는 잘한다고 해서 뽑힌 선수들인데도, 그처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무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십오 분 동안 교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무슨 인민재판이라도 벌어지는 듯 정말 살벌했습니다.
  물론 그 두 친구들 딴에는 다음 시합에서 더 잘해보자는 뜻에서 그랬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완전히 팀워크를 깨뜨리는 자해 행위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그 다음 경기에서 우리 반은 완패하여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한 팀 내에서 좀 잘한다는 선수들이 좀 떨어지는 동료를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가 좋게 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수준의 차이가 있을 때, 바로 그런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본문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란 뒤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아직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신앙생활이 성숙되지 못한 교인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처럼 약한 교인을 "받되"라고 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완전히 마음을 열고 받으라'는 뜻입니다.
  즉 그런 약한 교인이라 할지라도 자기와 꼭 같은 신자로 존중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 주라는 말입니다.
  "그의 의심하는 바"란 말은 그런 교인이 아직 복음 진리를 깊이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그것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약한 교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요약하자면, 교회 안에서 좀 잘 믿는다는 교인들이 신앙생활에 아직 좀 약한 교인들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더 너그럽게 자기 마음속에 받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왜 우리 기독신자들은 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약한 교우'를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받아 주어야 하는지 그 이유 세 가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용납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문 2절로 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들 안에서 자주 쟁점이 된 대표적인 윤리문제는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란 말은, 음식에 대하여 자유할 만큼 신앙이 성숙한 자를 가리킵니다.
  즉 사람이 율법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음을 확신하며, 또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등을 잘 알고 있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지 얼마 안 되는 신자들 중에 일부가 엄격한 음식 규례를 계속 지키고자 했던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 곳곳에 산재했던 우상 신전에서는 매일같이 많은 양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처럼 우상 앞에 일단 제사 드려진 고기는 그 일부만 완전히 태워지고 나머지는 시장으로 유통되어 나와 소비자에게 팔려 나갔습니다.
  그러니 어떤 기독신자가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이것이 우상제물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부 초신자, 즉 아직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붙잡혀 있는 자들은 무조건 고기를 사먹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오히려 '더 잘 철저하게 믿으려 하는' 신자들로 분류하려 하겠지만, 성경은 그런 자들을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가 생길 때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먹는 자"란, 우상은 헛것이므로 혹 그런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해서 고기 자체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즉 그처럼 자기 믿음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약한 자들 즉 절대로 고기를 사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 교인들에 대하여 그 어떤 우월의식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반면에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율법의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신자는 그처럼 서로를 향하여 우월감이나 비판의식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모두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신 상태라는 말입니다.
  자기나 상대방이나 다 하나님께서 '받아 주셔서' 신자가 되고 교인이 된 처지인데 어떻게 '내 믿음이 너보다 낫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라는 비유로써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므로 그 종이 서 있든지 넘어져 있든지 오직 그 주인이 알아서 할 바이지 옆에서 간섭할 일이 못됩니다.
  4절 하반절 말씀은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으니 저가 세움을 받으리라"고 말 순서를 바꾸어서 번역하는 것이 알기 쉽습니다.
  즉 우리 각자가 중생이라는 변화를 입고 교인이라는 모습으로 서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때문인 것입니다.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게 된 하객들이 그 임금 앞에서 서로 누가 잘 낫느니 못 낫느니 하고 다툴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만 해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할 일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뜻밖에 그런 영광스러운 부름을 받아 왕궁 안으로 황공스러운 발걸음을 들여놓게 되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까지 받아 입고서 그 잔치 자리에 앉게 된, 그 꼭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무슨 '도토리 키 재기' 따위의 유치한 비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꼭 같이 대통령의 특사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청와대 안으로 초청까지 받게 되었다면, 그런 자리에서 서로를 향하여 '내가 당신보다는 좀 더 괜찮은 인간이야.'라는 우월감을 품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꼴불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꼭 같이 죄 가운데 넘어져 있던 우리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홀로 일으켜 세워 주셨고 당신의 자녀로 친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가 되고 한 교회 교인이 된 처지에 '내 신앙이 너보다는 좀 낫니 어쩌니'하고 상대를 비판한다는 것은, 정말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꼴불견 정도가 아니라 '그 형제 교인을 세우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실로 교만하기 짝이 없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못난 죄인을 받아들여 주셨다는 사실을 늘 먼저 자각함으로써, 혹 내 눈에 믿음이 약하다고 여겨지는 교우라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가슴을 열고 서로 받아들일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를 위해 사는 목적은 같아도 그 방식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5절과 6절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음식 문제와 더불어 또 하나 당시의 대표적인 쟁점은 절기일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규정된 여러 절기들, 안식일부터 시작해서 매월의 절기들, 혹은 일 년에 몇 차례 모이는 큰 절기들을 신약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 역시 음식 문제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등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의 차이가 생길 때에는 그저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신앙양심의 판단을 따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날에 관한 문제'나 '고기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들은 모든 신자가 다 동의할 만한 어떤 한 가지 결론에는 도달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저 "각각" 즉 신자 개인이 자기 스스로 옳다고 여겨지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명백히 예스나 노를 규정해 놓지 않은 사소한 윤리문제에 대하여서 기독신자는 이처럼 각자가 신앙양심의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 양심의 자유란 것이 무슨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이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7절 이하 9절에 기록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신앙양심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의 생활입니다.
  신앙양심의 자유란 것이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자기 욕심, 자기 편리를 위하여 무분별하게 오용되기 시작하면 정말 큰일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최고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결국 폭군이나 욕심쟁이나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신앙양심은 반드시 한 가지 필수적인 조건에 제한되어지고 부합되어져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를 위하여"라는 조건입니다.
  자기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하는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자기 생명의 소유주를 바로 알아야 그 주어진 인생의 목적을 바로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실상 사단을 자기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진실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자기 생을 살도록 판단하는 일에 자신의 신앙양심의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윤리문제를 판단하는 신자의 양심이라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신앙문제에 귀결되는 셈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냥 '양심'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신앙양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윤리 문제를 두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의 기로에 서게 때, 정말 '주를 위하여'라는 목적만을 염두에 두고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 - 이것이 진정 신앙양심의 자유를 바로 누리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피차 바로 그와 같은 진실한 신앙양심을 가지고 판단해도 서로 달리 결론이 내려지는 윤리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목적은 분명히 같은데 '어떻게'라는 방식이 달리 판단되는 때, 즉 의견이 상반되는 때가 반드시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 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생기는 경우는 그 둘 중에 어느 한쪽은 틀림없는 이단입니다.
  이것은 정말 목숨을 걸고서라도 흑백을 분명히 가려내어야만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윤리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생길 때에 우리는 그것 가지고 죽니 사니 하고 싸우거나 비판하지 말고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고 이해해 주는 여유를 가질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지상교회도 꼭 같은 사람들이 모여 아무 사소한 충돌도 없는 완벽한 하모니의 공동체를 이룬 적이 없습니다.
  기독신자는 모두가 꼭 같은 '복제신자'가 아니라, 각각 '독자적 주체성과 개성을 가진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어떤 판단이나 의견의 차이가 생기는 것 자체를 겁내거나 회피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차이가 생길 때 대처하는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의견의 차이는 교회 분열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성도 관계와 교제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포용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지상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분열시키고 있는 문제들이란 것은 서로 조금만 마음을 열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같은 사장을 모시고 있는 사원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원은 매사에 밝은 얼굴로 사장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가 하면 어떤 사원은 외관상으로는 좀 무뚝뚝해 보여도 숨겨진 진실과 성실함으로써 그 사장으로부터 무언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만약 그 사원들이 "당신은 사장 앞에 잘 보이려고 그런 애교부리지 마시오."라든지, "당신이야말로 그 인상부터 좀 펴고 다니시오."라고 서로의 개성을 비판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주를 위하여' 사는 목적의식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윤리문제에 대해서는 '각각 마음에 확정'할 신앙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그 개인의 사소한 차이 때문에 성도가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교회 안에서 각각 필요한 지체가 되어 함께 '주의 것'으로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모든 신자는 각각 하나님 앞에서 최종판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로부터 12절 말씀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업신여기다'라는 말은 '내려다보다'(look down)라는 뜻입니다.
  "형제" 즉 같은 교회의 성도를 깔보는 행위는 마치 자기가 상대방을 "판단"하는 재판장의 자리에서 앉아서 피고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네가 어찌하여... 네가 어찌하여" 그런 교만한 행위를 할 수 있느냐고 두 번 반복해서 경책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형제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은, 우리 각 신자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밑에 있는 처지,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재판 받아야 할 피고의 처지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준엄하기 짝이 없는 심판대가 될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라고 했으니, 그 곳은 자기 곁에 꼭 같은 높이에 있는 사람을 도무지 내려다보려야 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으니, 거기는 남 고발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오직 자기 행한 것만을 하나님 앞에 이실직고해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마지막 날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자세로 정말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날 그 자리에서 결코 할 수 없을 일을 오늘 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도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율법의 "준행자"이지 "입법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율법 따라 판단을 받을 자이지 "재판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 입법자와 재판자 역시 오직 한 분이실 따름입니다.
  "너는 누구관대" - 도대체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훌륭하기에 그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신앙양심을 따라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도, 실상은 그것이 성경 말씀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명령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주장, 개인적인 선호도, 혹은 사회문화적 편견 등에 사로잡힌 것이 되어지기 쉽습니다.
  그런 개인적 윤리 판단이 자기에게만 적용될 때에는 그리 큰 문제를 야기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것 가지고 남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면 이것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자기 개인 신앙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그만 남을 판단하는 절대적 표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 심판의 권리를 월권하는, 심각한 신성모독이 됩니다.

  재판정에 피고의 입장으로 불려 나온 사람들이 판사 앞에서 저희들끼리 서로 고발하고 정죄하고 판결을 내리고 한다면, 그거야 그들 자신에게 법정 모독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첨가하는 행동밖에 다른 무슨 의미나 이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 가운데서 좀 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을 주교로, 추기경으로, 교황으로 세워서 그 앞에서 자기 죄를 고해성사하고 판결 받고 용서 받고 어쩌고 하는 곳이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착하게 살고 더 많이 신학공부를 하고 더 경건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너나 할 것 없이 오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꼭 같은 죄인으로 꼭 같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목사이든지 교인이든지 각자가 꼭 같이 자각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곳일 뿐인 것입니다.
  결코 자기 개인적인 기준을 가지고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는 재판장이 되지 말고, 오직 각자가 다 '자기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진짜 재판장 앞에서 직고하게 될 그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마음으로써,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형제 앞에 겸손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이나 금령으로 명백히 규정되어 있지 않는 윤리문제들을 통 털어서 '아디아포라'라고 부릅니다.
  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 안에, 그리고 각 성도의 신앙양심 안에 항상 끊임없는 질문들이 되었으며 또 그 대답들은 항상 나뉘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한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에 신앙 수준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윤리문제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도 생길 수밖에 없음을 미리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길 때, 우리들이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제일 첫 번째 원칙이 바로 그런 형제를 "받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와 애리조나가 맞붙게 되었을 때입니다.
  당시 애리조나 팀에 속해 있던 김병현 선수가 4차전에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역전 투런 홈런을 얻어맞더니 바로 그 다음 5차전에서도 꼭 같은 상황에서 꼭 같은 역전 투런 홈런을 맞고 말았습니다.
  모든 애리조나 팬들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고 절로 야유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 애리조나 팀의 포수가 마운드로 달려가더니 그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금세 쓰러질 듯이 보이던 김병현 선수를 그 큼지막한 덩치로 꼭 끌어안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월드시리즈 챔피언십을 자기네 팀이 손에 붙잡을 듯이 코앞에 둔 상황에서 두 번씩이나 그 기회를 날려 버렸으니, 아무리 동료선수라 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또 그것도 노련한 선배인 자기가 리드해 주는 사인을 따르지 않고 투수가 제 고집대로 던지다가 홈런을 맞았으니 웬만한 포수라면 자기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덕 아웃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포수는 동료 선수의 잘못을 비난하는 대신에 당장 달려가서 그를 꽉 부둥켜안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장면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보는 순간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애리조나 팀이 결국 7차전까지 가서 시리즈를 역전시키면서 월드챔피언이 된 것도 바로 그런 팀워크 때문이며, 김병현 선수도 바로 그 순간 그 포수의 포옹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받고, 비판하지 말라' - 동료를 살리고 팀을 강하게 만드는, 얼마나 요긴한 비결입니까?
  잘한다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처럼 동료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팀을 파괴하는 일도 없습니다.
  교회가 서로 비판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 곳이 된다면 피차 그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믿음 약한 자를 비판하고 판단할 때 그것은 그 약한 성도의 성장할 길을 일찌감치 막아 버리는 것이며, 잘 믿는다는 자들이 사소한 의견 차이를 두고 상대를 서로 비난할 때 교회는 간단히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먼저 용서하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애써 주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목적은 같아도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의 재판장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꼭 같은 피고들로서 나란히 서 있는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이것들을 늘 꼭 기억하고 있어야 교회는 '제 잘난 바리새인들'의 단체가 아니라 '같이 용서받고 감사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잔치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비판하지 말라' - 좀 약한 교인이라 해도 결코 비판하거나 재판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품안에 더욱 꼭 껴안아 줌으로써,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다 함께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경향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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