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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생활의 사랑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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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가정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가정을 지으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가정을 위한 준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다른 집단과 달리 가정은 ‘사랑’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데서 구할 수 없는 사랑을 가정에서는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 사랑이 문제 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젖혀두고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합니다. 다른 문제는 선택사항이지만 이것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성공한 가정은 성공했습니다. 경제나 명예를 얻은 가정이지만 사랑에 실패했다면 이 가정이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가정을 전합니다.

1. 가정은 구원이 있어야 합니다.

Newell Whilis 목사는 장례식 집례를 위해 뉴욕의 대저택에 갔습니다. 집 주인은 70이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죽은 딸의 관이 있었고 다른 옆에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친구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네. 자네와 나는 지금까지 행복한 시간과 성공을 위해 살아왔지.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중에 가졌지. 토요일 밤에는 포커를 하고 일요일에는 드라이브를 했지. 우리는 클럽과 은행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 그러나 내 아들이 부끄러운 결혼을 해서 나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고, 지금 딸이 죽었다네. 여보게. 자네에게 말하네만, 가정을 가꾸는 것은 오직 한 곳, 바로 교회밖에 없다네. 아이들을 위해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은 단 한 가지라네. 그들을 교회에 데려가는 것일세. 돈과 포도주와 포커, 그리고 일요일을 내 마음대로 보냈기 때문에 내 가정은 파멸한 것일세. 사람들은 결과가 닥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지만 나는 이제 알았네.”

노아는 “의인”의 반열에 듭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그는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전도했는데, 가족 외에 단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실패한 전도자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가정 구원이 신앙생활의 성공여부를 재는 기준입니다. 알렌 레드패스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 신앙의 실재가 가장 엄격한 시험을 받는 곳은 바로 그의 가정이다.”

2. 가정에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로버트 레이니는 스코트랜드 자유교회 목사였습니다. 뉴칼리지의 학장도 맡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혹독한 비판과 비난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뎌 내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레이니 목사가 말했습니다. “아, 자네가 알다시피 나는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편안해지거든.”

인생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곤고합니다. 좋은 것이 있지만 근본적 슬픔을 이기는 데 별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럴 때 가정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쉴 수 있습니다.

3. 가정에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디트로이트에서 판사로 활약하던 힐리는 Young People의 발행인 랠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법정에서 공소 사실을 심리하는 젊은이의 80%는 가정예배가 없는 가정 출신입니다.” 가정예배의 비율과 이혼 비율은 관계가 있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가정예배 인도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특권입니다. 아이들의 기도를 들을 수도 있고, 대화의 자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혼자 사신다구요? 혼자는 예배가 왜 안 됩니까? 벧엘의 야곱은 누구와 예배드렸습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는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가정예배나 지파예배는 기본 패턴이 있습니다. 1. 사도신경, 2. 성경읽기, 3. 주기도문. 여기에 찬송과 기도가 사이사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배드리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식구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는 가정이다.” 빈들에 있던 야곱이 예배드렸을 때 천사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4. 가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감사는 세 가지 차원을 말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입니다. 성공했거나 풍년이 들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했거나 흉년이 들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조건적 감사입니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입니다. 깨닫고 보니 감사한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셋째는, 신학적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조건적 감사도 아니요 깨달음의 감사도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가정에는 무조건적인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감사가 아니라, 무조건 감사하는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감사가 행복을 가져옵니다. 감사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5. 가정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랑장’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고린도 교회가 사랑이 없어서 분쟁했습니다.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많은 달란트가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장점들이 서로에게 고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그런 것에 집착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므로 믿음과 소망은 2등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에는 사랑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온전한 믿음이다.
      소망에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림이 온전해진다.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믿음과 소망이 온전해지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정에 늘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1. 믿음이 있습니다. 서로 믿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났습니다.

2. 한가지로 내일을 바라봅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기다리면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견디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는 서로에게 ‘천사’입니다. 아무리 부족한 아이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입니다.

어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천사야. 당신의 고향은 하늘나라임에 틀림없어.”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어요.”
남편: “아니야. 소설에는 그런 말이 없어. 나는 지금 천사를 만나고 있는 거야.”

장애자 아이를 일찍 보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이가 타던 자전거가 눈에 띄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얘야, 너는 지금 천국에 있지? 너는 천국에서 온 아이였어. 세상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을 네게 배웠거든? 고마워.”
어머니는 아이를 만남으로써 세상의 장애자들을 품을 수 있는 것을 배웠습니다.

4. 참 사랑은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러니칼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두려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 두려움과 부정적 두려움. 사랑에 함께 가야 할 두려움은 물론 긍정적 두려움입니다.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말을 조심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떤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장로님은 젊었을 때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결혼했지만 1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믿고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를 얻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을 때 많이 울었답니다. 옛날의 자기 모습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고 감히 나무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말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마음이 아니요,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 마음에 아픔을 줄까 보아서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 싶어 말을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은 긍정적 두려움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총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형벌이나 저주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 조심하는 그런 가정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말에나 일에나 실수가 없도록 조심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사랑에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할 것이 따로 있지, 사랑은 늘 부족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자신하지 말고, 늘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참 사랑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사랑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저희들은 날마다 사랑에 거함을 믿습니다. 가정에 온전한 사랑을 날마다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참 사랑을 가르쳐 주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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