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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1 (히 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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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 아브라함 링컨, 아브라함 카이퍼, 매슬로우, 칼 등등. 이런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부모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럼 과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는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연구하다 보면 실망스런 경우도 종종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생명을 구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했다.
창15장, 그의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었고, 창17장에서는 여종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고 격려해 주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로스웨이성경연구교재를 집필한 독일의 해리 웬트목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부르심에 대하여 순종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순종을 그의 믿음의 핵심으로 꼽는다. 아브라함 - 순종의 사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순종하였는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신앙이란 것 자체가 허구처럼 보인다. 한동대 총장 김영길박사는 요한복음을 읽다가 두 번 걸려 넘어졌다고 고백했다. 첫 번째는 2장의 혼인집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오병이어의 사건이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그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먼저 물질 불변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과학의 차이이다. 믿음이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나가는 것이다. 반면에 과학은 알아야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정직한 것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김영길박사는 미국 나사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과학자들이 점심시간에 모여 찬송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너무나 비과학적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것이 과학적이냐 아니냐 분석하지 않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믿음을 주시고 “떠나라!”하시면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해롭게 하랴!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앉은 여러분들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여러분들이 순종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앉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아침 12시까지 자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아침부터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예 토요일날 밤에 낚시 가방 메고 대부도 방파제 끝에 가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순종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라, 텔레비전 앞에서 일어나라. 그 자리에서 떠나라!” 순종했기에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닌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곳에서 떠나라고 명하실 때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명하시는 곳, 주께서 원하시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떠나라!” 명하실 때, “네!”하고 떠난 최초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숭배자였다. 아브라함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방신을 섬기며 오랫 동안 살아오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명하실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순종했다. 순종할 만한 믿음이 있어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강권적 역사하심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교회당으로 나온 것이 자신의 의지적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성령의 강하신 이끄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옛사람의 습관에서 떠나야 한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강력한 만져주심,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젠 다시 뒤돌아가면 안된다. 예)롯의 아내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할 중대한 교훈이 있다.
아브라함에게 어떤 위대한 믿음의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위대성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였다. 주께서 부르실 때 “아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존재에 대한 신뢰이자 인정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신뢰하고 인정할 때 순종, 곧 믿음의 행동이 따라 나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신앙경력을 가지고 있고, 무거운 직분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사람이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먼저 믿음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보는 것이다. 철저한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새벽기도, 금식, 구제등등.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교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혹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순종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자신의 삶 전체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가정생활, 직장, 여가생활, 금전적인 문제, 시간, 재능, 앞날의 계획까지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파도타기 선수처럼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갈바를 알지 못하며 나아간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는지 몰라!” 말로만 책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2.나그네로서의 삶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집을 짓지 아니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도 그의 손자 야곱도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하였다.

왜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하였는가? 가난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한 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많은 가축과 종들을 부리게 하셨다. 큰 집 지을 능력이 있었으나 짓지 않았다.
현대인의 성경
11:9 믿음으로 그는 약속받은 낯선 땅으로 가서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나그네처럼 천막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땅이 그들에게 영원히 살 땅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떠나야 할 나그네 신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있는 성도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다. 다윗왕의 기도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대상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성도는 나그네 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그네는 짐이 무겁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하다.
-어떻게 하면 재산을 더 불릴까? 어디 땅을 사면 투자 가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할 수 있을까? 누구를 찾아가서 줄을 대볼까?
-어떻게 하면 집을 천국같이 멋있게 꾸밀 수 있을까? 누구네 집에 가보니까 집 안에다가 뭣을 했다던데...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눅12:16-21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땅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땅에서 영원히 부요하게 살기 위해서 말뚝을 박지 않았다. 그는 부자였지만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래서 조카 롯과 다투지 않고 양보할 수 있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13:9)

성도들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 비록 땅 위에서 영원히 살듯이 집을 짓고 꾸미기도 하지만 그 심정은 늘 장막에 우거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자세이다.
아브라함도 1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어느 무명시인의 싯귀를 소개한다.

차창을 바라보니 산도 가고 나도 가고
차 내려 뒤돌아보니 나만 오고 산 아니왔네,
모다 두고 가는 것이 인생일까 하노라.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집착하지는 말라. 과욕이 죄를 낳는다.

3.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봄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0절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처럼 우거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가 집 짓고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막에서 살았던 이유는 보다 더 좋은 하늘의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어떤 성인가?
현대어성경
11: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건축에 있어서 설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건축가가 설계하느냐에 따라 건물이 되기도 하고 건축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고 기다렸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증거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견고한 건축물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리 그레함전도단의 찬양 가수인 킴 윅스 자매가 있다. 그는 한국인으로 6.25 전쟁때 실명한 후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미군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의 인디에나주립대와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한 성악가이다. 그녀는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소경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십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앞에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 놓으라 말하고, 앞에 흙탕물이 있으니 피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저를 인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기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저는 인생이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와 꼭 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기다보면 주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광스런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이유는 나의 믿음의 길 앞에 스스로 많은 장애물을 놓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된것에 대하여 후회가 되는 분 있는가?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안 믿었을 때가 훨씬 더 자유롭고 편했다고 말한다. 예수쟁이 되고 나니 불편한 것 투성이고 손해보는 것도 많다고 한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고향 생각이 안났겠는가? 사랑하고 보고싶은 친구들, 친척들 많이 있었을 것이다.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러나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그들 앞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도성이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땅만 바라보지 말고 자주 자주 하늘을 바라보라. 사람이 짓지 아니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천성을 바라보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그네와 같은 자세로 살기로 작정하라. 그렇다고 방랑자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그리고 하루 하루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면 언젠가 주께서 부르시는 주께서 예비하신 그 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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