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과 위로, 그리고 우리 (고후 1:3-11)

  • 잡초 잡초
  • 156
  • 0

첨부 1


고난과 위로, 그리고 우리 (고후 1:3-11)
   

영락교회 원로 목사님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을 잘 아실 겁니다. 그 분이 섬겼던 영락교회 강대상에는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손잡이가 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혹시 강대상에 올라 가시다가 쓰러지실까봐 손잡이를 붙잡고 올라가실 수 있도록 교회가 목사님을 배려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 만큼 한경직 목사님의 건강이 평상시에도 좋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폐결핵에 걸려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의술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들이 앞으로 잘하면 3년을 살 수 있으니 공부를 중단하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나와서 목회를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강대상에 오를 때 손잡이를 붙잡을 만큼 약한 몸을 이끌고 목회를 하면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평가를 내릴 때 그 분의 삶은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신 분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공항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 물건이 항상 똑같답니다. 간단한 세면도구만 가지고 다니셨답니다. 나중에는 공항 검색대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오시면 검색을 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켰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몸이 약하신 목사님은 항상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이라는 생의 철학을 가지고 사셨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참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의 몸이 약하기 때문에 그 분은 생활하면서 도리어 더 많은 것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허약한 당신을 하나님 나라 일에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허약한 당신의 몸을 정성껏 돌보아준 아내에 대한 감사를 했습니다. 약하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했고 누구보다도 많이 감사하며 사신 분입니다. 

1992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말하는 템플턴상을 받을 때 수상 소감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역시 한경직 목사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에 신사참배를 하며 우상 앞에 절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교회가 용서해 주셔서 오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영광의 주인공이 되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가장 큰 허물과 약점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잘 아시는 동료, 후배 목사님들은 한경직 목사님을 ‘약하셨던 분, 겸손하셨던 분, 정이 많으셨던 분’ 이라고 회상합니다. 손봉호 박사는 한경직 목사님을 ‘하늘이 내리신 가장 귀한 선물’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폐결핵으로 시한부의 인생임을 선고받는 고난이 있었지만 도리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큰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쉽고 평안한 인생은 없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인생에는 끝없는 고난와 아픔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고난 없는 생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생을 살았던 인생의 선배들이 인생을 끝없이 풍랑이 이는 바다에 비유해서 고난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의미는 고난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끝없이 일어나는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며 이겨 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장간에서 쇠로 연장을 만들 때 담금질을 합니다. 쇠를 뜨겁게 달구어 망치로 두드립니다. 그리고는 찬물에 넣습니다. 다시 용광로에 넣어 뜨겁게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만듭니다. 다시 찬물에 넣습니다. 쇠는 뜨겁게 달구었다가 찬물에 넣는 반복되는 담금질을 통해 더 단단해 집니다. 

인생도 고난을 겪고 극복하면서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알게 됩니다. 고난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잃어버리는 것도 많지만 반면에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이 더 많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119편 71절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통해 인생을 배우게 되고, 고난을 통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유난히 반복되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본문에 환난과 고난이라는 단어가 여덟 번 나옵니다. 둘 다 비슷한 단어이지만 원어의 의미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환난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어려움을 말합니다. 반면에 고난은 예측할 수 있었던 어려움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난과 고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서 갈등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저에게 이런 가혹한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항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삶의 차이는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고난을 단순한 고난으로만 보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와 고난 뒤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고난 앞에 당당히 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고난을 당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폐결핵으로 3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으면서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은 6`25 전쟁으로 고통과 시름에 젖어 있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본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동병상련’ 즉 ‘같은 병을 앓은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 는 말처럼 나 자신이 고난을 겪고 그 아픔을 이겨 나온 과정을 서로가 나누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삶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난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라는 단어입니다. 환난과 고난이라는 단어가 8번 나오고 위로는 10번이 나옵니다. 환난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위로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원치 않는 고난과 환난의 밤을 지날 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비바람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할 때 누군가가 내 곁에서 위로해 준다면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혹한 고난과 환난의 폭풍을 만났을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피난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직장 동료, 교회의 성도들이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이 위로가 되기보다는 더 큰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자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진정한 위로자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으로 인해 힘은 들어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으로부터 이기게 하시는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고백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당한 고난을 8,9절에서 사형 선고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위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자신들의 고난을 ‘사형 선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지켜 주셨고 회복시켜 주셨음을 10절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고난에서 자신들을 지키셨고, 지금도 지켜 주시고, 앞으로도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그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겪고 있는 고난이 있다면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분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단순히 고난에 시선을 모으지만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과 고난 뒤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축복에 시선을 모읍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고난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고난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볼 수 있는 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고난’ ‘위로’ 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18번이 나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입니다. 외롭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춥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추운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 되어 컴퓨터만 켜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가 발달되면 될수록 우리들의 마음에는 외로움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 추운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따뜻한 위로자이며 친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 힘들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몸을 녹이고 쉴 수 있는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온기가 있어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로 말하자면 화롯불이 피어 있는 사랑방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는 현상 가운데 하나로 불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불로 인한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인간적인 우정이나 세속적인 오락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면 그곳은 교회로서의 한계성을 곧 드러냅니다. 그런 따뜻함은 세상에서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따뜻함이 영혼을 어루만지지는 못합니다. 결국은 더 외로워지고 관계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따뜻함이 영혼을 위로하고 쉬게 만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온기를 가지고 교우들 간에 서로 따뜻함과 위로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강조됨은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위로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섬길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온기를 가지고 섬기는 가운데 따뜻함을 만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 표정과 섬김 속에서 새로 오시는 교우들이 거룩한 온기를 느끼고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따뜻함을 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