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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역적 사랑과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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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우리들이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도로서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참된 평강이 임합니다. 예수님도 요 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변함없이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성도들 중에서도 주님의 참된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주로 성경 말씀의 잘못된 이해와 교회의 잘못된 영향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한 부류의 성도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영적인 영역 안에만 머물며 평강과 안식을 찾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영지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경향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무시하고 영적인 충만함 속에서 평강과 안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자신이 속한 세상 현실의 압력과 핍박 속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또 한 부류의 성도들은 영적인 세계를 포기하고 세상의 소유의식에만 머물며 평강과 안식을 찾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기복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경향입니다. 영적인 소망의 영역들을 무시하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소유의 풍성함과 자기 욕심의 충만함을 통해 육적인 평강과 안식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복적인 소유들이 자신의 마음에 평강과 안식을 줄 수 없음을 알고 갈등을 겪습니다. 이러한 두 경향성 모두 잘못된 것이며,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결과들입니다.

성경에서 “세상”은 주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일 2:15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시는 창조된 세상입니다.

우리들은 두 세상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미워해야 할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세상이지 하나님께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세상의 창조 영역과 대상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모든 영역과 대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악의 세력, 타락한 가치관, 죄의 존재들은 미워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영지주의로 흐르거나 기복신앙으로 흐르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사역과 삶의 현장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과 영역과 일과 공동체 등 세상 만물들을 예수님처럼 사랑할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 사랑과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도록 사랑을 주셨습니다.

2. 사역의 현장을 향한 사역적인 사랑 속에 회복의 소망이 임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어서 우리의 사랑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우선순위에 있어서 이웃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이 앞서야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에는 그 이웃과 함께하는 모든 창조 영역과 대상들도 포함됩니다. 그 이웃과 함께하는 모든 사역과 삶의 영역과 대상들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을 향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믿음을 지극히 큰 믿음으로 보십니다.

마 8:5-13에 나타나는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은 그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고의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 8:5-6은 사역과 삶의 현장을 향한 백부장의 이웃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보여 준 사랑의 행위는 자신의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모습에 잘 나타납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직업 군인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복자로서 특권적인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얼마든지 새로운 하인을 취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 함께하는 자신의 하인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마 8:6에 보면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백부장의 사역과 삶을 돌봐야 할 자가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 처했지만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린 그 하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괴로움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백부장으로서의 직무에 걸림이 되는 상황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당시의 배경으로 돌아가 보면 하인은 백부장의 이웃에 해당하는 사람 측에도 들지 않는 노예였습니다. 물건과도 같았습니다. 즉 백부장의 사역 영역, 삶의 영역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더구나 중풍병에 걸려 쓸모없게 된 물건과도 같은 존재를 사랑하며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하인”으로 표현된 “파이스”라는 헬라어는 “소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어린 종”이었던 것입니다. 능숙한 장년의 종도 아닌 어린 종이 중풍병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었고, 언제 반역하여 달려들지도 모르는 점령지에서 이방인들의 메시아 앞에 달려 나가서 간구할 정도의 사랑으로 하인을 사랑하였습니다. 눅 7:2에서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하며 그 사랑을 직접 언급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안목은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에 대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한계를 인식하며, 그 한계를 해결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게 합니다.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통해 자신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역에서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문으로 알던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한계를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간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역과 삶의 영역에서 발견된 자신의 한계를 주님께 들고 나온 간구로서 사랑으로 인해 드러난 현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백하며 나오는 백부장에게 마 8:7에서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는 자는 그 영역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한계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는 구원에의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며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영역 속에 놓여진 각종 어려운 문제들을 들고 나오는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는 소망을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망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소망이 없는 우리를 일으키시기 위해 우리에게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이 구원과 회복의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돌아보는 자는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사역 영역을 사랑하며 돌아보는 자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각종 어려움과 문제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역과 삶의 영역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중풍병과 같은 문제를 맞이하는 자들마다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의 눈으로 돌아보면 수많은 어려운 현실들이 보입니다. 마치 하인의 중풍병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 친지, 교우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스스로 회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위기와 정치 현실이 보입니다. 스스로 움직여서 방향을 잡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보입니다. 구원과 회복에의 소망이 없어 보이는 가정의 막힌 담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들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합니다.

3. 주님은 사역과 삶의 현장을 통한 사역적인 사랑과 믿음을 원하신다.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 없는 자의 눈에는 중풍병자의 모습이 버려야 할 존재로 보입니다. 귀찮은 존재이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 간구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사역적인 사랑이 있는 자들만 예수님께 그들을 이끌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의 영역 속에 자신의 능력으로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영역과 대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고백적인 움직임에 응답하셔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에게 이러한 사랑만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그렇게 크게 칭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직업 속에 나타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고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역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역적인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마 8:8-10은 백부장의 사역적인 믿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사역과 삶의 현장을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영적 안목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며 그 모든 영역을 주님께 들고 나올 수 있는 자에게 임하는 영적 안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는 영적 안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믿음의 안목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서 이러한 영적 안목의 사역적인 믿음을 발견하시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 8:8-9에 보면,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는 믿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직업을 통한 영적 고찰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권위자의 명령이 곧바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사역적인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고 확신하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예수님의 사이의 관계를 알고 믿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반응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의 위치임을 아는 것이며, 자신의 주권자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 현장이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백부장은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미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자였으며,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확신하는 자였습니다. 또한 그러한 사랑과 믿음으로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담당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사역적 사랑과 믿음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견고한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로 묶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며,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존재들을 주님께 이끌고 갈 수 있는 사역적인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사역적 사랑과 믿음을 극찬하셨습니다. 마 8:10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8:11-12에서 이러한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이 천국에 앉지만 그렇지 못한 본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간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역적인 사랑과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과 삶의 영역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 가운데 다가오는 수많은 중풍병적인 부족함과 연약함과 문제들을 주님 앞으로 들고 나가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러한 사랑의 행위가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사역적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역적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온 백부장에게 마 8:13에서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하셨습니다. 그러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믿음을 보여 준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 대한 사역적인 사랑과 믿음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도 우리의 사역과 삶의 영역을 사랑하며 돌아봅시다. 우리들이 주님께 사역적인 믿음으로 들고 나갈 중풍병 환자와 같은 역역과 대상들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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