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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지개를 보라 (창 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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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일입니다. 국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중공군이 대거 개입을 했고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인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진격작전보다 후퇴작전이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유엔군에 속한 한 중대가 후퇴하여 중공군을 피해 산골짜기로 급히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작전이 실패하여 한 해병중대가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골짜기를 양 사방으로 포위하고서 계속 좁혀오는 중공군에 의해서 포위된 해병중대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한 순간을 느끼면서 모두들 낙심하였고 잠시 후에는 싸우다가 죽든지, 포로로 끌려가든지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지친 몸으로 몹시도 피곤해 하고 있는 것을 본 한 종군기자가 한 병사에게 물었습니다.“왓 캔 아이 두 포 유(What can I do for you?)”.“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습니까?”이때에 지칠 대로 지쳐서 힘에 겨워하며 병사가 대답을 합니다.“기브 미 투모로우(Give me tomorrow)”.“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그랬다는 겁니다. 이 말은 후에 유명한 말로 전해집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입니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닙니다. 지위도 아닙니다. 내일입니다. 내일이라고 하는 미래, 소망의 문제가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소망이 보이면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살 의욕마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으로 사는 동물인지를 생각해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자고로 인간이란 많이 배워서 많이 알아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자연과학(自然科學),사회과학(社會科學),인문과학(人文科學),생명과학(生命科學)을 다 배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생명공학(生命工學)까지 하자는 것입니다. 생명공학(生命工學)이 뭡니까? 생명과학(生命科學)이란 생명에 관계되는 현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생명공학(生命工學)이라고 하는 것은 좀 다릅니다. 소위 말하는<바이오테크놀로지(biotechnology)>라고 하는 것인데 생명 현상이나 생물 기능 그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기술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가령 유전자를 재조합한다든지, 세포를 융합 시키는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육종, 의료, 공해 방지 따위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응용이 시도되고 있는 좀 더 질 높은 삶을 위한 고등의 학문입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이러한 학문들이 연구되고 지식으로 습득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습니다. 환자를 놓고 고민합니다. 이 사람은 이런 병이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연구를 하고 실습을 해서 압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전부가 치유 되지는 않습니다. 이게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인간은 아는 만큼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아는 만큼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인간은 그가 가진 것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백만장자라 할지라도 그가 가진 만큼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라서 오래살고 가난하다고 일찍 죽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인간은 과연 무엇에 의해 살아가는 것일까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소망만큼 그는 살수 있고, 그가 가진 소망만큼 행복한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의 가치 있는 인생사에 대한 평가란‘그가 얼마나 유식하게 살았느냐? 그가 얼마나 부자로 살았느냐?’더 나아가‘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 보다는 그가 얼마를 살았든지‘정말 행복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있다는 것, 미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그 시간, 그 미래를 결코 멀리, 그리고 길게 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과 내일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요, 나의 미래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타락한다고 모두가 걱정합니다. 여러 면에서 타락의 징조가 있고,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우리 모두가 걱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타락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미래가 보장되고 환하게 장래가 보이면 당장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소망의 문제요, 종교의 문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믿음의 문제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살아가는 남녀노소의 궁극적 관심은 도덕도 아니요, 정치도 아니요, 경제도 아닙니다. 그 이전에 바로 종교여야 합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곧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 믿음이란 깊이 생각하면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궁극적 관심인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궁극적인 관심인 믿음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이 여러분을 강력히 붙들고 있느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거든 네 가지 궁극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시고, 또 하나는 궁극적 상태입니다. 믿음의 상태는 변하고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계속 변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는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궁극적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를 다스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보수입니까? 아니면 과거가, 열등의식이, 피해의식이 그렇습니까? 내 인격과 내 운명, 그리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궁극적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 뭡니까? 옷입니까? 다이아몬드입니까? 집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식입니까? 이것들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한번 바람이 휘몰아 갈 때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은 아닙니까? 궁극적 가치, 여기에 관심을 두고 오늘을 살면 이까짓 것들은 다 시시한 것이요, 아무 의미도 없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면 내가 살아 온 일들과 내가 살아가야 할 길들이 보입니다. 즉 내가 어떻게 여기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내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가를 기억하고, 공감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자세가 우리의 삶을 바로 세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노아에게 그러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질 것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노아 시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버리고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 완전히 멸망시켜 버려야 마땅한 세상에, 심판의 매를 드시는 그곳에서도 의인을 남겨 놓으시고 육축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방주를 오래 전에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구원하셨으며, 어떻게 생명을 허락하셨는지를 평생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세상을 다시 새롭게 세워가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기 원하시는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끊임없이 꿈꾸는 하나님의 상상력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홍수의 심판을 경험한 노아가 이후에 살아가야할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살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자, 그런데 면전에 무서운 홍수의 심판을 경험한 노아로서는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모든 생물이 일순간에 휩쓸려 흔적조차 없어지고 공허한 땅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노아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또 다시 이런 홍수의 심판이 닥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먹을 것, 누릴 것조차 없는 이 땅에서의 삶이란 생존 가능성 제로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허탈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황량한 들판만 바라보고 서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말씀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십니다.“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약속의 징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지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죄 때문에 사람을 포함해서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까지 모두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의 가족과 노아가 불러들인 암수 몇 쌍씩의 피조물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쓸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 외에 살아 있는 것들이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그 삭막하고 공허한 곳에 떠올랐던 무지개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웠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그 무지개는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고난과 멸망과 심판의 자리 한복판에서 지금 노아는 무지개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이었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향한 소망의 징표였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부르짖음이 때로는 고난의 연고입니다. 도무지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는 또 다른 고통의 호소입니다. 내 몸뚱이조차 추스르지 못하여 몸부림쳐야만 하는 연약함은 우리들의 속절없는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땅의 삶 속에서 어떤 고난이 있고 어떤 심판의 매를 맞는다 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참 소망에 사는 사람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참 소망을 수용하기 위해서, 소망을 알게 하기 위해서, 소망을 지켜가게 하기 위해서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은 잠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장 17절에서 이것을“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고난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절망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이 있다면 잠시 받는 경한 환란이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모래알 속에서 세상을 보고/ 들꽃 속에서 하늘나라를 본다./ 손 한 뼘으로 무한을 쥐고/ 짧은 한 시간으로 영원을 잰다./ 그것이/ 유한자가 지닌 축복이다.”하나님이 보여 주신 약속의 징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유한자인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 앞에 영롱하게 빛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 저미도록 밀려오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구원하시는 능력에 심장이 떨려 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옛날 노아에게 구원의 징표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영원한 구원의 무지개를 오늘 우리에게도 높이 올려 주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의 무게에 이끌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의 무지개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비가 갠 후 햇빛에 비쳐 빛나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비춰 주는 징표라면, 십자가는 멸망시켜 마땅할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요, 이 땅에서의 고난과 고통과 아픔이 있지만 궁극적 믿음에 붙들려 살면 그 고난, 그 아픔, 그 고통이 변하여 영광이 되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무지개 징표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무지개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고로,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를 바라보는 것이요, 곧 십자가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 관심인 믿음이 나를 포로하고, 내가 그 믿음에 붙들려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무지개를 보라>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제목입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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