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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락방에서의 결론 (요 16: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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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간단하게 말하면 세 마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평안 하라.
담대 하라.
그리고 승리하라입니다.

신앙 이라는 것은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사는 것처럼 인간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보세요.
우리도 세상에서 살잖아요?
신앙인들도 똑같이 이 세상의 사는 사람들과 같이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육신에 따라 살자니 “그렇게 살면 안돼” 하고 영혼이 소리를 칩니다.
이번엔 영혼 따라 살자니 “아 세상에서는 그렇게만 살 수 없지”하고 육신이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을 갈등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보세요.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나도 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뭐라고 하였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오죽하였으면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과 육의 갈등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을 벗어나서, 주님의 품 안에서만도 살 수 없고, 또 주님을 완전히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갈등의 존재입니다.
기억하세요. 우린 언제나 이 두 차원의 각기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첫째로> 주 안에서 평안 하라 하셨습니다.
히브리말로 평안을 샬롬 이라고 하는데,
우리 다 같이 히브리 식으로 인사를 나누어 볼까요?
‘샬롬’
여러분 모두에게 진정으로 ‘샬롬’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이 평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 14:27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에 보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환경이나 조건이 주는 육신적인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은 환경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어떻습니까?
이 심령이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문자로서도 말로서도, 표현할 수 없는 평안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죄의 평안이 이렇게 좋은 거예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기쁨을 가리켜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시 23편을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도 인도하시는도다”
잊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풍파,
환란,
역경,
질고,
병마,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정치 금권이 얼마나 가던가요?
그래서 찬송을 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 가리”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안전합니다.
요 10:28-29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손,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이중 삼중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디서나,
언제나,
안전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 안에서 담대 하라 하셨습니다.
이 담대 하라는 ‘안심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미 역사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만 하나님의 법궤가 바알의 신전과 우상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무리 강하고,
크고,
장대할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모두 다 패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을 때에 시험이 옵니다. 유혹이 옵니다.
사단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을 하지만, 에서는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살아 계시는 동안 얼마나 모략질을 당하셨나요?
때리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모욕과 온갖 희롱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참고 이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사망의 세력을 이기신 분입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까지도 이기신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자기를 닮고,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

다윗이 칼이 좋아서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방패가 든든하고,
칼이 날카로워서 이겼고,
갑옷이 든든하였기 때문입니까?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오지마는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승리 했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승리자인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기가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 안에서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만 가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기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면서 다 이기신 줄 아십니까?
잘난 척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을 따르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머리,
우리의 대표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 5:4-5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요?”
사도 바울은 딤후 4장에서 말하기를 “믿음을 지키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다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유혹이 있으나, 언제나 굳게 서서 진실 된 길을 가며, 박해를 참고 견디라” 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이기시렵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원하는 대학교입니까?
경험이 많은 것인가요?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세상을 이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주님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환란이 있을 때 오히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유혹도
환난도
고통도,
비난도,
실패도,
슬픔도, 병마도
심지어 죽음도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고,
주님 안에서 담대하시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세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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