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과 제자 (마 16:21~28)

  • 잡초 잡초
  • 235
  • 0

첨부 1


제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자란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을 닮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우리는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 물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일 알고 싶어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과연 선생님을 무엇으로 섬기면서 따르고 있는가?

네! 어떤 사람은 모세라고 하고요,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도 하고요,
또 많은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나서면서 제일먼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듣고서 너무 흐뭇해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가 알게 한 이는 너 자신도 아니요,
네 가족도 아니요,
네 혈유도 아니로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가 알게 하신 것이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베드로가 누구 입니까?
시골 무명의 청년에 불과 했습니다.
그저 힘으로만 살아가는 어부에 불과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감화 아니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또 있습니다.
2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던 베드로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졸지에 사단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가 즐거운 일은 될 수가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죽지 말라고, 아! 정 그렇다면 인도로 도망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베드로의 말에 틀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맞아요.
누가 죽는 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단이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단입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사단입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가라 막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가라 막습니까?
바로 신임 받는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가끔 이처럼 인간의 친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려는 우리들을 가라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약 260회 정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도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도 힘들까요?

교수가 되려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수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교수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만해도 전체 인구의 ¼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마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겠는가?”
“사람은 많으나 일꾼이 부족 하구나”

사도바울은 종종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굴레를 쓴 노예”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고삐 껴져 있는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주인 되셔야 하고,
나는 그 분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렇게 하고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런건 제가 경험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세요!
지난 430년 동안 홍해가 갈라지는 걸 본적이 있습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는 어떠합니까?
반석이 쪼개지면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본적이 있나요?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그저 함성 소리에 무너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이란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불가능이요, 불치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면 불가능이 가능이되고,
불치가 완치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인으로서, 순종만하면 오늘도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12바퀴를 돌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그만 돌았다면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까요?
엘리야가 6번 기도하고 일어서 버렸다면 갈멜산의 기적이 일어났겠습니까?

신앙이란 온전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너는 나를 따르라’의 말씀입니다.
신앙이란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으로 면류관을 쓰는 승리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이므로 사람을 가리시지 않는 주님을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우리들도 오늘날 교회에 다닐 수가 있는 거겠죠.
또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러나 각오해야 합니다.
또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는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마땅하게 지불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찬송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도들의 신조만 외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신 곳을 나도 가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하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나도 당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이긴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 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골 3:5에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였고
롬 8:13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행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의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의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죄든 다 끊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죄를 다 씻어 버리고 그것이 음식이든, 사교생활이든, 오락이든, 생활습관이든 다 예수님의 뜻이 아니면 다 버려야 합니다.
누가 담배를 아직도 계속 피고 있는지 주님은 알고 계시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아직도 술을 마시면서, 소리를 치는지 어서 버리세요. 어서 끊으세요.
지금까지는 내 생각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이것이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한 번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부인하고,
죄를 저질렀으면 회개하고,
육체에 속한 것을 끊어 버리고,
죄의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더러운 죄를 또 다시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버리려면 아픔도 있습니다.
딤후 3:12에 보면 “무릇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면 핍박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오늘도 불신앙의 가정에서 교회에 나오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우리교회에서도 ‘인간승리’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 대신에 세상 따라 편하게 살다가 지옥엘 가시렵니까?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느냐 않느냐는,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기에게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이 길은 위험합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모욕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왜 걸어야 합니까?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예와 아멘으로 걸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세종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