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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가 터지면 물고기는 같이 물 따라 내려갑니다 (대하 28: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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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당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비기찬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21세기 초입인 지금 50년, 1백년 전처럼 우리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지축이 흔들리고 동북아의 판이 요동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고, 일본이 급변하며, 미국이 세계전략을 다시 짜고 있고, 북한은 극단적인 생존책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지금 3조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합병하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독도를 자국의 땅이라 주장하며 보통국가화(우경화)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흥망』저자 폴 케네디 예일 대학 교수는 한국을 '미국중국일본러시아라는 네 마리 코끼리 사이에 앉아있는 작은 동물'에 비유하였습니다. 미국은 고립과 개입의 외교 원칙에 따라 한반도를 놓고 국익을 저울질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의 현상은 구한말 당시의 양상과 흡사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백년 전 1905년 일본은 러시아 전쟁의 승리를 통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 해양 세력인 영국. 일본. 미국이 한편이었고 대륙세력인 러시아. 프랑스. 중국이 또 다른 편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그런 세력 충돌 속에 서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1960년대 초의 한국과 아프리카 가나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 농업의존도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경제상황이 서로 아주 유사했는데, 그로부터 30년 후 한국은 1인당 GNP가 가나의 15배나 되는 산업 강국으로 자라났습니다. 경제규모 세계 12위, 식민지였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유일한 나라. 일본의 36년 압제와 6.25전쟁, 분단 60년이라는 악조건을 딛고 이룩한 성과치고는 정말 기적에 가깝습니다. '짝퉁'을 만들기에 급급하던 우리 손으로 반도체, 선박, LCD, 휴대폰 등 세계 초일류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류가 세계 곳곳에 퍼지고 있습니다. 15세기 세종시대 때 찬란했던 민족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11세기 고려 때도 문명과 무력이 모두 충실한 황금기가 있었고 8세기 통일 신라 시대 때에도 당시로서는 최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저자는 말하기를 앞으로 20년 우리 나라는 악순환을 깨고 선순환을 만들어 그 시대처럼 세계적으로 흥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20년이 우리 나라가 흥하느냐 쇠하느냐의 중요한 기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나라의 흥망의 조건을 다섯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무력을 낳고 이 둘이 결합되어 세계패권국가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명과 무력의 중심인 패권국가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민족의 흥망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융성했던 때는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때이고 반면 쇠망의 시대에는 이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방황하고 적대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취적인 비전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취적인 비전은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파악하고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결집할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황금기인 세종시대는 진취적인 비전에 매진한 시대였다고 합니다. 반면 민족사의 망국기인 고종 때에는 진취적인 비전을 갖지도 널리 공유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통합으로 구심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조화시키며 이질성을 용인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표용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력한 패권력을 가진 4대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구심력을 잃으면 강력한 원심력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합의 리더십이 민족의 흥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일제 식민지지배, 한국 전쟁같은 민족의 위기 때에는 나라가 권력 투쟁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학습과 창조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선 시대, 앞선 나라를 배우고 익히지 않고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에서 세계를 이끄는 대국의 등장은 항상 학습과 창조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로마,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일본 모두 엄청한 학습열과 창조력을 발휘하여 그 시대의 선진대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힘의 근원인 국민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고 코리아의 운명을 개척하는 힘의 근원은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외세는 반드시 반대 급부를 요구하고 국민의 힘만이 진짜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4가지 요소는 첫째가 코리아의 가치, 둘째 세계 패권국인 미국의 코리아 정책, 셋째가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중국의 코리아 정책, 넷째가 북한의 생존력에 대한 평가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진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요약하면 우리 나라가 흥하려면 패권국과 좋은 교제를 하며 온 백성이 한 마음으로 비전을 가지고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 마다 패권국이 한 나라의 흥망 성쇠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전쟁과 지배의 역사로 볼 때 그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고대에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없으면 결국 다른 나라에게 지배를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12대 왕 아하스도 정치적 계산을 합니다. 당시 강력한 패권국가로 부상한 나라는 앗수르입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셋 3세가 선진 문명을 바탕으로 주변국을 점령해가고 있을 때입니다. 유다 나라는 당시 아래로 발달된 문명을 가진 과거의 패권 국가 애굽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이 부상하는 것처럼 신흥 앗수르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위쪽에서 부상하여 남하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약소국인 아람과 북쪽 이스라엘은 패권국에 대항하는 반 앗수르 정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을 한 남쪽 유다왕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썼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은 서로 동맹하여 먼저 유다를 치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이 동맹하여 유다를 진격하였습니다. 예루살렘만 점령하지 못하고 유다 땅을 모두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했지만 아직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무참하게 연합군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그 전쟁에서 12만이 죽었고 20만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오늘 어떻게 해석해 주고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지구 중심적 사고에서 태양 중심적인 사고로 전환했던 코페루니쿠스적 사고 전환처럼 인간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역사로 본문을 보고자 합니다. 성경이 그런 관점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우주를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민족이 흥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이 우리 사업이 우리 인생이 흥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갖가지 든든한 보가 무너지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 인생의 흥망 성쇠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왜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토 확장이나 영향력의 확대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패권 전쟁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손에 붙이시매....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붙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하루 동안에 용사가 10만이 죽은 것입니다.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무기가 잘 개발되지 않은 고대 전쟁에서 하루에 10만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쓰러진 것입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불행이 순식간에 다가온 것입니다. 어제까지 건강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쓰러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때까지 든든했던 인생의 보들이 하루아침에 무저져 버린 것입니다.

7절에 보십시오. 나라의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해야 할 뛰어난 인재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세계 정세 속에서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잘 파악했을 것입니다. 당시 패권국인 친 앗수르 정책을 쓰는 것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나라는 친미냐 친북이냐 다투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친청, 친일, 친러, 친미 등으로 싸웠습니다. 이들 정치 지도자들은 민비와 같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왕의 아들 마아세야, 궁내대신 아스리감, 총독 엘가나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아마 친 앗수르 정책을 썼던 핵심 정치인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20만이 사로잡혀갔습니다. 그 재물을 많이 노략질 당했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요. 국제 정세를 잘 익지 못해서입니까? 줄서기를 잘못한 것입니까? 군사력과 경제력이 없어서입니까? 당시 할아버지 아버지 때 최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명과 무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서입니까? 진취적인 비전을 널리 공유하지 못해서라고요. 통합으로 구심력을 확고히 하지 못해서입니까? 학습과 창조로 세계 최고가 되지 못해서라고요. 왕이 힘의 근원인 국민과 함께 하지 못해서입니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하스가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20살에 왕이 되어 16년 동안 왕으로 통치하면서 언약의 자손으로 다윗과 같이 행하지 않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 우상을 부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부어 만든 왕은 유다 왕 중에 이 사람뿐입니다.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악랄한 왕으로 하나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1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왕 아하스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 왕이지만 실제로는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왕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심각하게 우상을 숭배하였는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종교적으로 썩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3절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우상에세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침범한 암몬 나라의 더러운 풍습입니다. 몰렉에게 장자를 인육 제사로 드린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비상식적인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토착 가나안 사람들의 미신적 신앙을 수용합니다. 오래된 나무에 신비한 힘이 있을 거라고 미신적 생각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산당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국토를 무당화시킨 것입니다. 종교가 썩어 버린 것입니다.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려면 법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법이 썩어 있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이 썩을 지라도 교육이 살아있다면 그 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교육마저 썩어도 종교가 살아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마저 썩어버리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고려의 불교가 그랬습니다. 이씨 조선의 유교가 그랬습니다. 로마의 기독교가 그랬습니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정신의 근원은 종교에 있습니다. 정신 세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신앙입니다. 로마가 패권국가가 되고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이 한 시대 속에 패권국가가 된 것은 단순히 학습열과 창조력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가그 시대 정신이 되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창조적인 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 발전한 것이 복음과 전혀 무관할까요?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의식이 바뀌었습니다. 정신이 바뀌없습니다.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건강한 정신이 그래도 생겨났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가 지어지고 병원이 지어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산꼴자기까지 종소리가 울려나고 찬송과 기도가 새벽부터 이 강산을 울렸습니다. 중국이 급부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평적으로만 역사를 보지 말고 수직적으로 역사를 보면 일억 정도의 기독교인이 복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작은 로마가, 영국이 강해진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인디언의 나라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가 된 원인이 어디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할 때 이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민 33:51-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 28:9)”라고 했습니다.

유다 나라의 왕권은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다윗 집안이 소명에 합당하지 않으며 그 왕권을 잃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추방하면 그것이 번영인 것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경제에서 예술에서 우리의 삶의 의식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인간이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면 그것이 번영일 것같지만 결코 흥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결코 하나님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10)”입니다. 하나님을 경회하는 자에게 새힘을 주십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흥망성쇠가 여호와께 있음을 진심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역사의 주인으로 지금도 우리의 삶의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이 그저 침묵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힘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가장 풍성한 원동력을 얻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순전한 제사를 드리는 시간,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나약한 시간이 아니라 능력의 시간 풍요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경배를 통해 시대가 살고, 경제가 정치가 바르게 걸어갑니다. 민족의 앞 길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펴쳐집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워 시대를 이끌어가시길 원하십니다.

2. 우리는 우리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징계로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국이 침범했을 때 아하스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패권국의 도움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이사야서 7장 1절을 보십시오. 아하스 때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에 보십시오. “외적은 연기나는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다를 점령하고 왕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7).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그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나는 구하지 안니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을 의지합니다. 기업에 절박한 상황이 다가왔습니다. 가정에 절박한 상황이 다가왔습니다. 뭐 그런 문제를 푸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데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병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고 얼굴 화장만합니다. 위장병을 치료해야 얼굴이 화사해질 텐데 위장병은 놓아두고 좋은 화장품만 사서 아침저녁으로 바릅니다. 근원을 치료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을 고치는 것이 미신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말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입니까? 돈으로 풀고 이성적으로 풀어야 하지 뭐 하나님께 징조를 보여 달라고 간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다시 역대하 28장 17절을 보십시오.
에돔 나라가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갔습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아마샤와 웃시야 이래 유다 속국이었던 나라입니다. 조공하던 나라입니다. 망둥이도 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곳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도 침범합니다. 저항력을 잃어 버리니까 갖가지 질병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없던 병도 생기는 것입니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업이 망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거래처부터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사람들부터 배신을 하는 것입니다. 복수의 기회를 노렸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고 했습니다. 형편없이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낮추시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렇다고 앗수르가 도와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패권국이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따름입니다. 미국이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실용적으로 행동할 따름입니다. 이익이 되지 않으면 뱉고 이익이 되면 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국제 질서는 살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관계는 철저히 수지 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친미 반미가 문제가 아닙니다. 친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패권국가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패권의 일생에 대하여 모델스키는 세계 대국, 비정통화 단계, 탈집중화 단계, 패권 승계투쟁이 일어나는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패권국과 도전국 간의 격차가 급속히 좁혀질 때는 도전국이 패권국에 도전하는 ‘미숙한 정쟁’이, 패권국이 도전국을 제압하려는 ‘예방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영원하였습니까? 영원토록 변하시 않으시는 분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돕지 않고 도리어 군박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고 아람과 이스라엘을 점령할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유다가 그 빌미를 제공하여 자신들이 점령해 버립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가 돕기는커녕 오히려 괴롭힙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보물을 뇌물로 줍니다. 방백들에게서 재물을 취해 뇌물을 줍니다. 남북 정상화를 위해 러시아에게도 주고 북한에게도 주고 중국에게도 뇌물을 줍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보다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이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처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백성들에게서나 강대국에 수치만 당하고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곤고할 때에 더욱 하나님께 범죄해 버립니다. 어려운 때 더욱 하나님을 멀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병드니까 사업이 잘 안되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다가오니까 더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스는 당시 다메섹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디글랏 빌레셀이 숭배하는 우상의 제단을 보고 디글랏 빌레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에 돌아 오는 즉시 그 제단과 동일한 제단을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16:10-16) 어용 제사장 우리야에게 만들도록 합니다. 이제 제사장의 권위까지 휘두르다가 망했던 사울과 웃시야처럼 제사장을 마음대로 주무르면 성전 제사를 변질시켜 버립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성전 기구 가운데 우상 숭배에 필요한 기구는 용도 변경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운동을 가져다 놓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골프를 헬스를 다이어트를, 텔레비전을 가져다 놓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구들은 한 곳에 모아 방치(왕하16:10-18)했습니다. 성전 본관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대하29:7). 예루살렘 구석구석마다 단을 쌓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분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전국토를 우상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앗수르의 허수아비가 되어 버립니다.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됩니다. 군사 정치적으로 무능한 나라가 되어 버립니다. 선왕이 이루어 놓은 부강과 번영을 유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국이 되어 버립니다.
25결을 보십시오.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습니다. 여호람과 요아스에 이어 세 번째로 열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돕는 힘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1)”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2)”
하박국은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6)” 곤고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은 징계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흥하고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 가운데 어떻게 유다 백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가를 보시시오.
북쪽 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20만의 유다인 포로를 잡아 왔을 때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8-15) 선지자는 포로를 잡아 온 이스라엘 사람을 향하여 세가지를 책망합니다. 첫째 그들의 무자비 책망입니다(9). 둘째 자신들도 범죄했다는 것입니다(10). 셋째 형제 자매(11)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들을 석방합니다. 이 때 모습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서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려 돌아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한 선지자를 통하여 부패한 백성이 징계 가운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죄를 징계하지만 언약 만큼은 파기하지 않습니다. 구속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절대 은혜로 진행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아하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들과 유사하게 인생을 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의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도 생각해 보면 아하스와 같이 여호아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옛 옷을 벗어버리고 의로운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복음의 새신을 신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을 바르고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건강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흥망 성쇠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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