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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거울을 볼 때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하 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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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어떤 성격 급한 사람이 운전하고 가는데 상습 차량 정체구간을 만났답니다. 언제쯤 정체가 풀리려나 짜증내고 있는 데 앞서가던 택시가 샛길로 빠지더랍니다. 그래서 택시 기사는 길을 잘 알기 때문에 따라가면 되겠구나 하고 열심히 쫓아갔답니다. 이것을 눈치챈 뒤에 있는 차량 몇 대가 뒤를 따라 왔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쫓아가도 보이는 길은 나오지 않고 드디어 택시가 멈춰 서더랍니다. 그리고는 그 뒤를 따라서 줄줄이 멈춘 차들 앞에서 택시 기사가 나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 오줌 좀 누려는데 왜 자꾸 따라와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쫓아가기를 좋아합니다. 모방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 있을 때 가끔 발을 떠는 습관이 있습니다. 고치려 해도 어느 순간 발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밥을 먹는데 식탁에 앉아 발을 떠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모방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평소에 어른들이 하는 말을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지만, 어른들이 하는 행동은 빼놓지 않고 쉽게 모방합니다. 그릇된 어른들의 행동에 대하여 욕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배우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모방하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부모입니다. 멋진 아들, 딸은 부모의 좋은 점을 잘 모방하고 나쁜 점은 철저히 개선하고 부모에게 없는 것도 창조적으로 개발하여 후손에게 주는 아들, 딸입니다.

오늘 나온 본문은 제 11대 왕 요담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다 왕 20명의 왕 중에서 오늘 나오는 요담은 아버지를 의식적으로 거울삼아 산 사람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요담왕의 특징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같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포로 생활하였던 에스라라는 사람이 기록한 말씀인데 41념의 요담의 삶을 단 9절로 압축하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요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성경의 일차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요담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2절과 6절이 핵심적인 구절일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요담은 부친 웃시야를 많이 의식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시야를 거울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를 6절에서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입니다. 우리도 우리 부모를 거울로 반영하여 살아 다른 사람이 우리를 평가할 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약해지고 점점 기울어지고 점점 잃어버리는 사람보다는 점점 강하여지는 사람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옆 사람과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성도님, 우리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됩니다.” “ 진심으로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 영적으로 점점 강하여 져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원리, 사랑의 원리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 삶을 잘 구현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강력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강하여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골 2:15)”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승리하여야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모든 걱정 근심에서 참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담은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어느 정도 요담이 통치하는 유다 나라가 점점 강해졌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국제 정치 속에서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대인관계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회사로 말하면 경쟁업체나 거레처와의 관계에서 주도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암몬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해에도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석을 조공하였습니다. 그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좋은 점을 거울로 삼아 반영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웃시야는 유다 나라에서 최대의 판도를 이루어 놓은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웃시야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성경을 보십시오. 26장 8절을 보십시오. “심히 강성해졌습니다.” 그런데 아들 요담은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점점 강성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사 심히 강해졌는데 아들 요담은 거기에 덧붙여 점점 강성하여져 그 땅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광개토왕 장수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유다 나라는 그렇게 강력해질 만한 좋은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북핵 문제로 6자 회담을 하며 고민하는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강력한 여러 나라와 인접해 있었습니다. 지중해 쪽으로는 강력한 블레셋이 있었고 홍해 쪽으로는 에돔 나라, 사해 쪽으로는 모압, 위로는 이스라엘, 우리가 볼 때 홍해 오른 쪽 위에는 암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은 두 나라입니다. 위로는 티그리스강 유프라데스강 상류에서 힘을 가지고 번성하고 있는 앗수르와 아래로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는 이집트가 있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치 속에서 아주 작은 나라인 유다가 점점 강성해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이룬 최대의 판도를 강력하게 지키어 냈습니다.

아버지가 사해 항으로 나가는 에돔 나라에 있는 엘롯을 지배하고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블레셋 땅을 정복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확보하였는데 그것을 지켰습니다. 아버지 때에 암몸을 쳐 조공을 바치게 하였는데 역시 암몬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최고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최고를 지속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요담 왕은 최고를 지속적으로 지켰습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지켜 내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보입니다.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전쟁에 대비한 전략 기지를 만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경제 건설을 합니다.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였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 확장하고 수리를 하는 것입니다. 또 오벨 성을 많이 증축하였다고 했습니다. 4절에 보니까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였습니다. 오지까지 도로를 만들고 집을 개량하고 도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이룩해 놓은 경제적 부를 잃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경제 건설을 기반으로 더 확장했습니다. 아버지가 하지 않은 성전을 수리하고 지방 오지까지 개발시켰습니다. 점점 강해졌습니다. 우리고 점점 강력해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부흥되고 나라도 발전하고 가정도 더욱 부해지며 평강과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때에 미치지 못한 것까지 강력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이나 엘리 처럼 기우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무엘처럼 다윗처럼 점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통해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강력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나라가 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1. 부모를 거울로 삼아 부모의 좋은 점을 반영하여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는 데 있습니다. 정도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정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 경영을 하는 것입니다. 바른 경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관이며 정치철학이었습니다. 빨리 가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느리더라도 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방향이 문제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를 행하여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편법을 쓰고 꾀를 부린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편법을 쓰고 꾀를 쓰면 순간적으로 강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강해지지는 못합니다. 생명이 길지 못합니다. 편법과 꾀는 생명이 길지 못합니다. 정도 정치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을 보십시오. 음모가 판을 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힘이 최고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성공만 하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왕 여로보암 2세가 죽고 14대 왕 스가랴가 왕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반역에 의해 살롬이 피살되었습니다. 살롬이 15대 왕이 되었으나 바로 1개월 만에 므나헴에게 피살되었고 16대 왕이 된 므나헴이 죽고 17대 왕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지만 2년만에 베가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세상에는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때입니다. 권력욕에 혈안이 되어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모방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반면 교사로 삼았습니다. 아버지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어떻게 할 때 나라가 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멋진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아버지의 단점을 최대한 억제하는 아주 멋진 아들이었습니다.

부모의 좋은 점은 닮아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이해를 돕기 위해 표준 새번역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주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주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은 계속하여 악한 일을 저질렀다. (대하 27:2)”

하나님 보시기에 아버지가 정직하게 행한 것은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웃시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26장 4절입니다.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좋은 점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 역시 아버지의 좋은 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2. 부모를 거울로 삼아 부모의 좋지 않은 점은 철저히 관리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계승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주의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일까요? 예배를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3절에 나와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은혜가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도 은혜가 충만하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애를 썼고 성전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일까요? 아버지를 반면 교사 삼은 것입니다. 26장 16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강성하여지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저가 강성하여 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을 하였습니다.
요담 왕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월권을 행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왕실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죽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웃시야는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해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아마샤를 보십시오. 25장 19절을 보십시오. 에돔 나라를 이기고 나라가 강력해졌습니다. 그러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고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도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하고 신하들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담의 아버지 웃시야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그대로 따르다가 자신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담은 달랐습니다. 그 고리를 끊어 버렸습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악을 추방했습니다. 제사장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를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한 선을 그은 것입니다. 확실하고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하는데도 인생에 성공하는데도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점점 강성해지려면 이 분명한 가치관과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살면 지속적으로 강성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세계 열강의 외교관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았던 인물은 런던 주재 독일 대사였다고 합니다. 그는 분명 더 높은 자리로, 비록 독일연방의 총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독
일의 외무장관까지는 승진할 것으로 예상되었답니다. 그런데 1906년 그는 갑자기 대사직을 사직하고 말았답니다. 그 당시 에드워드 7세가 영국 국왕으로서 재위 5년째를 맞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 외교사절단이 국왕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답니다. 15년 동안 런던에서 주재했던 독일 대사가 그 날 만찬의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답니다. 에드워드 7세는 유명한 난봉꾼이었고, 또한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만찬을 분명하게 지시했답니다. 그는 후식이 나온 후 만찬이 끝날 무렵, 거대한 만찬 케이크가 등장하는 순간 등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뒤따라 12명 이상의 창녀가 나체로 들어오도록 주문했답니다. 그러자 그 독일 대사는 그 만찬을 주재하지 않고 대사직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아침에 면도를 할 때, 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이 난봉꾼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거부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대사를 그만 두었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한 것이 성공이고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돈이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마케팅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수로 정당화되고 돈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도 좋다는 생각이 우상처럼 지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도, 말씀도, 설교도 마케팅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꼭 이루는 것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요담이 41세에 죽었는데도 성경은 왜 점점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거울 앞에서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분명한 가치 시스템입니다.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적당히 석이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는 자일수록 힘있는 지위에 있는 자일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점점 더 강해집니다.
요담은 그 일 때문에 다시는 비참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경계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의 삶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삶의 찌꺼기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성령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3)”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7)”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 2:23)”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벧전 2:1)”라고 말씀합니다.

3. 부모를 거울로 삼아 우리는 부모에게 없는 것을 더욱 창조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후손에게 거울로 남겨 주어야 합니다.
요담은 후대에 강력한 나라가 지속되지 못하는 화근을 남겼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반면교사, 타산지석으로 삼아, 아버지를부터 받은 좋은 것은 잘 개발하고 아버지의 단점을 철저히 잘 차단했는데 자신의 인생을 창조적으로 개발하지는 못했습니다.
좀더 높고 좀더 넓게 보지 못한 것입니다. 민족과 미래를 보며 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사악을 행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경제가 활성화되자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해지자 은혜를 받자, 강력해지자 백성들이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습니다. 요담은 이것을 방치해 버린 것입니다. 부하 관리를 잘못한 장교와 같습니다. 직원 관리를 잘못하여 부도가 나게 한 사장과 같은 것입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아버지의 잘못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잘했는데 적극적인 면에서 백성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강력하게 끌지 못한 것입니다. 창조적인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방은 모방에서 끝나지 말고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마 16년간 통치(BC 747-731)중 10년의 섭정 기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같습니다. 아버지와 공동통치(26:3), 아들과 공동 통치(왕하15:38) 기간을 빼면 실제 단독 통치 기간은 3, 4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일년을 맡든 10년을 맡든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준 것을 창조적으로 개발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성취하여야 합니다. 2달란트든 1달란트든 5달란트든 상관이 없습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부자집에 태어났던 가난한 집에 태어났던 아버지는 똑같은 아버지이고 아들을 똑같은 아들입니다.

백성들의 사악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왕하 15:34-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담은 오랜 동안 지속적으로 백성들에게 뿌리 박고 있는 산당 제사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민간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이방신을 섬기는 관습을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랬을 것같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부터 뿌리박고 있는 토착신앙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이었고 가나안 사람들은 농경사회 사람들입니다. 농사가 잘되려면 이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물신 숭배입니다. 구조적인 사회 악입니다. 누구도 타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이제까지 선왕들이 하지 못한 것 왜 내가 하냐고 방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를 해야 했습니다. 민족 독립을 위해 독립 운동가는 죽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 않습니까? 스데반은 물고를 바꾸기 위해 순교했지 않습니까? 어떻게 희생없이 거대한 물결이 바꾸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아들 때에 가서 나라가 기울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는 나라를 바벨론에게 망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 버립니다.

28장에 보십시오. 요담은 25세에 왕이 되어 16년 동안 정치를 하고 41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아하스가 12대 왕이 되었습니다. 아들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절부터 4절까지 읽어 보십시오. 온 땅이 우상 숭배로 붉게 물들어 버렸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추방하고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버리니까 하나님이 저들을 버려 버립니다. 아람 왕의 손에 붙여 버립니다.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여 버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12만이 죽고 20만이 포로가 되고 재물들을 노략질 당했습니다. 점점 강성한 나라가 패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은 자신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삼을 때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라고 왕을 세운 것입니다. 요담왕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작은 거울은 잘 보았는데 큰 거울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은 늘 살펴보며 화장을 하였는데 아들 딸이 바람나 변화되는 얼굴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의 얼굴 민족의 얼굴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창조적 리더십이 부족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초석을 마련해야 합니다.

“성공한 왕 실패한 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왕조 찬란한 500년 역사 속에서 살았다 간 27명의 왕을 연구하여 성공한 왕5명 실패한 왕 5명을 선정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왕으로 치밀한 국가 경영술을 보인 태종, 수평적 경영 마인드로 위대한 성취를 한 세종, 견제와 균형의 지배원리를 실행한 성종,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 인재를 잘 발탁한 선조, 공명정대하고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보인 정조를 꼽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성공한 왕들의 공통점은 국운이 성하고 쇠하는 근본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으며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기 보다 신료와 백성들을 신임하며 국제 정치에서도 국익을 우선해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왕들은 절대 권력을 사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면서 정치를 자신의 권력연장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의미있는 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으로 말하면 권력을 주신 분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나의 사유물로 전락시켜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렀습니까?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라고 불렀습니까?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된 임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자신 만 잘 먹고 잘 살라고 부른 것 아닙니다. 모세를 불러 자기만 행복하게 살라고 부른 것 아닙니다. 민족을 세우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시고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이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이 비록 적은 무리였지만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문화, 학문 등 곳곳에 미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점점 강한 나라, 점점 강한 기업, 점점 강한 교회, 점점 강한 가정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개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중요한 타인'이라고 하는데 그 중요한 타인의 첫 번째는 부모이고 그 다음은 교사이고 친구입니다. 부모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나는 비춰진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처럼 부모를 통해 우리는 나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부모를 거울로 삼아 부모의 좋은 점을 반영하여 발전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거울로 삼아 부모의 좋지 않은 점은 철저히 관리하고 추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거울로 삼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들고 부모에게 없는 것을 더욱 창조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후손에게 예수님을 닮은 거울로 남겨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는 말이 우리 이름에도 따라다녀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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