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옷을 찢으며 외친 소리 (행 14:8~18)

  • 잡초 잡초
  • 339
  • 0

첨부 1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는 ‘쓰스’와 ‘허메’라는 신과 관련된 전설이 있었습니다. ‘쓰스’와 ‘허메’ 신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그곳을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신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냉대하고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바오시스’ 만이 두 신을 자신들의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신의 저주로 홍수가 나서 그곳 사람들이 물에 잠겨 멸망당할 때, 신을 환영한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은 신전이 되었고, 그들은 제사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자손들이 그 마을을 지키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전설을 가진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지체장애인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지체장애인이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하고 놀란 그곳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의 형상을 입고 강림한 ‘쓰스’와 ‘허메’로 보았습니다. ‘쓰스’는 신들을 다스리는 신인 ‘제우스’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풍채가 좋은 바나바를 ‘쓰스’라고 했고, ‘허메’는 쓰스의 대변자로 언어를 발명한 웅변의 신이기에 말을 잘하는 바울을 ‘허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와 화관을 가지고 와 그 앞에서 제사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행동에 옷을 찢으며 분격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소리 질러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옷을 찢으며 소리를 외쳐 만류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외쳐 만류한 행동은 무엇일까?”에 대답하는데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들의 전설에 의한 잘못된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곳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전설을 승화하고 발전시켜 쓰스 신당의 부흥과 발전을 기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지체장애인을 걷게 하는 기적의 사건을 일으키자, 그들은 두 사도를 쓰스와 허메라고 하며 제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옷을 찢는 외침은 이들의 잘못된 하나님 이해를 안타까워하며, 잘못된 하나님 이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을 하나님 되도록 하라는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루스드라 사람들과 같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이 신앙을 어떠한 목적에 이용하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간이 만든 많은 이념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많은 업적성취의 능력자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또는 많은 업적을 이룬 능력자들의 영광을 위해 섬김을 강요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탐심을 승화시킨 탐욕의 형태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고 임의로 만들어지는 분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목적과 의도에 따라 이리저리 이용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께 나의 전제된 요구를 강요하는 거짓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외쳐 막았던 것처럼,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뜻과 목적에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공적, 능력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념이나 공적, 능력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백세에 난 아들이 그에게는 생명보다도 더 귀중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그의 믿음은 이삭이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과감히 거부한 신앙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하나님이 주신 축복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것은 우상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곧,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탐심”이 주인이 되어 있을 때 그것은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을 때, 바울이 옷을 찢으며 거부했던 것처럼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데서 인간의 바른 삶이 시작되고 세워집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제사하려는 무리를 향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자신들은 신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그러나 이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 죄의 지배 아래 사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짐과 동시에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에서 ‘성정’은 원어에서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의로운 것 같으면서도 거짓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하고, 깨끗하면서도 더럽고, 용감한 것 같으면서도 비겁하고, 절제하는 것 같으면서도 탐욕스럽고, 평화스러운 같으면서도 불안하고,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어있고, 소망 중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절망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자주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데서부터입니다.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데서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됩니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임을 발견하게 하는 곳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여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인간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고 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요구할 때, 그 요구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되고 수용되지 못하면 화를 내지 않습니까? 또한 내 의견은 절대적이고 틀림이 없다고 끈질긴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는 데서 나타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할 때, 그곳에 거짓과 위선의 인간부패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엘리야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 5:17) 엘리야는 기도함으로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고, 다시 기도함으로 비가 내리게 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런 엘리야를 철저히 인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해도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온전함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나 연약성 때문에, 끊임없이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체장애자를 고쳐주는 기적을 일으켰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리와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차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단지 인간을 인간되게 하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인간임을 깨닫는 지혜를 가짐으로, 그것이 인간의 진실함과 값진 인격과 아름다운 모습이 만들어 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15절)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에게 증거 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곧 인간들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로 증거 하시는 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라(17절) 고 했습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어리석음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의 온전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자신을 증거 하시며 선한 일을 베푸시며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 관계를 바르게 할 때, 참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 인간됨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세 번 태어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출생은 어머니 배속에서 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탄생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섭리이자 운명이고 불가사입니다. 이 출생으로 나의 존재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 출생은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을 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생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생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게 하는 태어남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태어나는 종교적 출생입니다. 이것은 생의 심화이고 삶의 혁명이고 존재의 중생입니다. 이것은 나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뉴욕의 이발협회는 선행을 베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길가에서 잠자고 있는 거지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양복을 입히고, 머리를 근사하게 깎아주었습니다. 거지가 아주 훌륭한 신사가 되었습니다. 이발협회는 자신들의 선행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람을 다시 빈민굴로 돌려보낼 수 없다면서 일자리와 방을 얻어주고,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출근하도록 했습니다. 거지는 감사하며 가더니 다음날 12시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9시부터 기다리던 이발협회원들은 그 거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거지는 어느 더러운 골목 길가에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술에 곯아떨어져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이렇듯 이발을 하고 새 양복을 입었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W. R. 잉게’는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히 속해 있을 때에 가장 진실 되고 강렬하게 자기 자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참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지 못한 인간이 외관으로만 변화한다고 해서 바른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만 될 수 있습니다. 곧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셔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주시고자 십자가의 부활의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되어 집니다.
  옷을 찢으며 외친 바울의 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인간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과 인간의 참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루스드라에서 옷을 찢으며 외친 바울의 외침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인간을 인간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참 인간을 성취해 가시는 참 축복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