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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망한 심정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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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은 서론과 결론 사이에 5개의 가르침 단락과 5개의 이야기 단락이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4장은 이야기, 5-7장은 가르침, 8-9장은 이야기, 10장은 가르침, 11-12장은 이야기, 13장은 가르침, 14-17장은 이야기, 18장은 가르침, 19-22(23)장은 이야기, 23(4)-25장은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은 8-9장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10장을 시작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35절을 보면 4:23절의 내용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5-9장의 내용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는 봉투기법(inclusio)라는 문학적 장치로서 두 구절 사이의 내용을 한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5-9장의 내용은 ‘예수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 있는 말씀(5-7장)과 권세 있는 행위를 통해(8-9장)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천국의 모습을 계시하셨습니다.

35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 형태로 요약됩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첫째는 가르침(teaching)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는 사역입니다. 둘째는 전파하심(Preaching)입니다. 가르침과 함께 묶을 수도 있지만 애써 구별하자면 조금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아니든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고치심(Healing)입니다. 영육 간에 병든 자를 고치고 모든 악한 것을 고쳐서 회복하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을 계승해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건전치 못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3가지 형태의 사역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쳤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선포하면서 전도는 하는데 가르쳐서 양육함이 부족하다든지, 지성적으로 잘 가르쳐서 양육하는데 힘을 쏟는 반면에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일에 약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실제적으로 약하고 악한 것들은 잘 고치는 반면에 계속해서 바른 진리를 명확하게 잘 가르치는 일에 소홀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3가지가 균형을 잃어버렸을 때 교회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건강한 신앙은 3가지를 골고루 경험하고 있는 신앙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과연 그런가 하며’ 성경을 상고하고 깨닫는 반응, 때로는 깨닫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반응,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실제로 당면한 각종 문제들이 해결됨을 체험하는 반응이 건강한 신앙에는 골고루 있습니다.

반면에 건강하지 못한 신앙은 3가지 중에서 어떤 부분을 많이 결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르치는 말씀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있는데, 성경 전체의 진리에 비추어서 과연 올바르게 이해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없는 사람은 분별력이 약해서 헛되고 거짓된 사상에도 잘 속아 넘어갑니다. 이해되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이해되지 않는 일방적 진리의 선포는 배척하는 합리주의적 자세를 가진 사람은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해도 결국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낸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은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높이 둠으로 해서 결국 바르지 못한 신앙에로 나아갑니다. 또 말씀에 단순히 순종해서 심각한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기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 중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건전치 못한 신비주의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은혜를 주셔서 말씀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잘 받으면서도, 과연 그 말씀이 전체 성경의 진리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하시고, 비록 온전하게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깨달은 만큼은 구체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는 건강한 신앙이 형성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언제나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이 보이신 사역의 모습을 잘 계승하는 바람직하고 건강한 교회로 자라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36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에 가졌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어떠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민망히”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내장이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뜻입니다. 즉 ‘민망한 심정’은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함께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상태로서 성경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님의 두드러진 성품입니다(14:14; 15:32; 20:34; 18:27). 예수님은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그 대상,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던 그 대상,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들에 매여 있는 그 대상을 바라보시며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문둥이의 슬픔을 함께 느끼셨고, 혈루증 여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인으로서의 삶을 의무감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인생들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사실 몰래 다가와서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 자기 유익만 챙기고 떠나려는 혈루증 여인을 괘씸하게 볼 수도 있었습니다. 딸자식의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만 있는 야이로를 보며 무능하고 한심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무지 속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보시면서 답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 인생들을 굽어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눅 15:20). 탕자의 형은 돌아온 동생을 보며 ‘한심하고 답답한 녀석’ ‘괘씸한 놈’으로 여겼지만, 탕자의 아버지로 비유된 하나님은 그를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는 이 마음을 가지시지 않았더라면 어떤 인생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 인생을 양에 비유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풀어놓으면 알아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동물은 목자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맹수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어무기가 전혀 없습니다. 숏 다리에 원통형 몸이라 작은 구덩이에도 잘 빠지고, 성질은 급해서 한 번 구덩이에 빠지면 헤쳐 나오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며 버둥거리기만 합니다. 방향감각도 없어서 목자가 인도해주지 않으면 꼴이나 물을 찾지 못하고 우리로 돌아오지도 못합니다. 결국 목자 없는 양은 맹수에게 찢겨 죽거나 황량한 벌판을 헤매다가 탈진하여 죽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합니다. 고생과 방황이 많았던 사람들은 사납고 거칠게 변합니다. 그러나 겉보기에 강하고 터프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속을 들여다보면 연약한 양과 같음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참 강인하게 보이는 선배님 한분 계셨습니다. 도무지 절망할 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진취적으로 사셨고 삶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어려워도 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풍성하게 베풀기를 즐기는 분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존심 강한 독종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저같이 우유부단하고 쉽게 절망하는 사람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이었는데, 하루는 험난했던 지난 삶을 회고하며 이야기하다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울음을 애써 참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분의 지난날 ‘고생과 유리함’이 제 마음까지 민망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강해 보여도 내면에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안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연로하든 젊든 ‘고생하며 유리하는’ 심정을 전혀 가져보지 않는 사람은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단지 감정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문둥이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어주셨고, 혈루증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녀를 고쳐주시며 평안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치고 또 고쳐도 민망히 여겨야 할 대상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도와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무리들을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은 가만히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님께서 하신 일을 계승해서 똑같이 행할 일꾼들을 세우시려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7-3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는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10장에 가서는 구체적으로 12명의 사도를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세우셨을 때는 그들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복음 사역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사역 위에 오늘날까지 교회는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웃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늘 골골거리며 사는 사람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사람들, 제 앞가림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거만한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답답하게 볼 수도 있고, 한심하게 볼 수도 있고, 괘씸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 분의 백성이라면 ‘민망히 여기는 마음 자세’를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의 모습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찾아볼 수 없었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대 사람들 특히 고생하며 방황하는 젊은이들에 대해 민망히 여기는 심정을 새롭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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