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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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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보면 소위 짝뚱제품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전에 중국에 갔을때 명품을 흉내낸 “짝뚱” 제품들이 너무나도 싸게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렴풋이 겉으로 보면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전부 가짜인 것입니다. 한번은 거리에서 로렉스 시계라고 하면서 한개에 만원이라고 하면서 파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지 않으니까 다음에는 만원에 2개 그 다음에는 만원에 5개를 외치면서 팔았습니다.
이런 가짜의 문제가 중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짝뚱제품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뉴스에 의하면 미국은 우리나라를 지적재산권 보호와 관련해 블랙리스트나라로 지정했으며 일본에서 적발된 가짜 상품의 50%가 한국산으로 짝뚱제품이 많은 나라중에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다고 합니다. 유럽 역시 `2005년 대한 통상보고서'에서 위조상품 단속강화를 요청하는 등 주요 선진국들이 우리 나라를 짝뚱 수출국으로 인식, 국제 사회에서 국가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뿐 아니라 통상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짜의 문제 소위 짝뚱의 문제는 세상나라만의 문제가아닙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는 외적으로 본다면 전체국민의 20-25%라고 합니다. 숫자적으로 본다면 천만명에서 천이백만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소위말하는 세상의 명품처럼 명품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 이것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부정적입니다.

종종 저는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하여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들이 교회를 그만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속에 가짜들 때문에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이렇게 저렇게 비판합니다 .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는 소위 교회 속의 가짜들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지적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대부분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성품의 문제 인격의 문제들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100%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님같이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져가려고 하는 노력과 순종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 된다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내가 변화하려고 노력해보았는가 얼마나 내가 새로워지려고 수고와 땀을 흘려보았는가? 그것을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대부분 우리 인생의 문제 사람과의 문제 교회의 문제는 바로 마음에서부터 생깁니다. 지금 빌립보교회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집사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왜 서로 외적으로 싸우고 분쟁하고 있습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내부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속에서 보면 서로 불화하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바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가정 속에서 부부간의 관계가 어렵고 직장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영혼이 구원받음으로 우리 속에는 새로운 지식 감정 의지가 생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 안에는 부패한 경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패성은 우리 속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인 성품과 육적인 성품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옛사람처럼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은 이땅에서 남은 생애 모두가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주님닮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 거룩을 명령합니다.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너희”라는 부분은 이미 구원받은 빌립보성도들이요 이미 구원받은 우리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싸우고 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먼저 우리 주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의 생각 의지의 선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에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 인격의 변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변화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마음만 먹고 변화의 생각과 의지만을 갖는다면 엄청난 변화와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을때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는 삶으로 드려지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낮추어야 합니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여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에수님은 100% 하나님과 같은 본질의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자신을 동등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낮추시되 어떻게 낮추셧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8절 전반절을 보면 자기를 낮추시되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신 종으로서 이땅에 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철저하게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백성과 일꾼으로서 주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 먼저 갖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통해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나를 비워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생각 뜻에 대해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나를 높이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내가 먼저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합니다. 왜 이렇게 나를 비우기 보다는 나를 높이려고 합니까? 지금 내 안에 채워진 것들을 보십시오. 나는 높임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정도면 착하고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나를 봅니다. 또 때로는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돈 명예 지식을 갖고 나를 높이려고 합니다. 때로는 교회 속에서 직분을 계급처럼 갖고 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런게 겸손의 시작은 바로 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때에 그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비우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사도는 존경과 큰 권위의 자리였습니다. 사도로서 그는 존경과 높임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스스로 낮아져서 교회를 섬기면서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부르심을 입은 자리에서 항상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내려놓고 섬기고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울을 보면서 배울 점은 이 겸손은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할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나를 강조하고자 하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하다 믿음이 좋다 신앙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결국 하나님보다 내가 높아지고 남보다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이제까지 교회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믿음이 좋고 신앙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을 주장하려고 하고 교회를 주장하려고 하고 내가 높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분들은 항상 교회 속에서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고 교회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말을 보기좋게 하면서 나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고 종으로서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이런 분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비판만 난무합니다. 그리고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많아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성장하여 갈 때 꼭 교회들이 진통을 겪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인가 무명한 사람으로 남는 것인가 하는 자기 인정으리 문제입니다. 대개 작은 교회에서는 핵심의 자리에서 대접을 받던 사람들이 점점 교회가 커지면서 무명인사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니가 “나는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하는 소외감에 빠집니다. 대개 개척교회의 경우에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이것저것 다 합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돌아갑니다. 이런 개척교회에 익숙한 사람은 비록 몸은 고생이지만 인정받는 자기의 위치 때문에 그것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가다 교회가 커지면서 점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그러면서 소외감을 갖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점점 교회에서 우리가 생색내기를 하려고 하면 할 수록 시험이 듭니다. 내가 교회에서 생색내기를 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부터 주님은 간데없고 인간 아무개 사람만 있게 되게 됩니다. 정말 생색내기의 열정이 있다면 그 마음과 열정으로 이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좁은 교회에서 움크리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그 열정과 에너지를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갖으려고 할때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
여러분 교회를 나의 성공의 장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맥도 못추고 영향력도 미추지 못하면서 교회에만 오면 자꾸 독기를 품고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려고 하고 내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주님이 그 속에 없습니다.

때때로 교회 속에서 무명의 사람으로 남지만 주님을 배우는 자로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지는 자리에서 자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람이 되어지기를 힘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을 배우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때가 되면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하고 따라올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좋은 선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알 아야 할 것은 내가 배운만큼 내가 변한만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지금 나에게 우리 주님은 모든 이론과 생각과 뜻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소유하는 마음과 생각이 먼저 우리 속에 실천되기를 소원하십니다. 내가 감정 내 이론 내 지식을 내려놓고 그분의 겸손을 닮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몸으로 순종합니다.

8절 중반절“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은 우리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복종하실때에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난 우리 주님은 나의 마음 나의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대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겸손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몸을 복종합니다. 복종하고 순종할 때 진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저는 교회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뜻이라면 자기를 쳐서 순종하시고 복종하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다 허락하여서 환경이 허락하여서 조건이 되어서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소원하시기에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기에 우리 주님의 뜻이기에 힘이 들어도 감정은 안되어도 조건이 어려워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순종하기 힘들도 어렵고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주일날 주님 앞에서 나와서 예배드리기가 때때로 싫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몸을 쳐서 순종하면서 드릴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도 나면 내 자신이 그런 순종을 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대견스럽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이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순종하기 어렵고 하기 싫을때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는 순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 속에서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사역을 하시기에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봉사의 사역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주신 은사와 사명 안에서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비록 육체적으로 고생이 되어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 쓰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닮을때  마음에서 몸의 순종으로까지 될 때 주님을 참으로 배울 수 있고 주님의 사람으로 새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기까지 우리가 각오할 것은 “고난”의 댓가을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배우고 내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저절도 되는 것이 아니고 순종을 통한 고난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를 크게 기쁘게 하는 뉴스를 함께 대했습니다.
우리나라 피겨스케이팅 1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세게쥬니어 피겨스테이팅대회에서 우리나라의 16세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뉴스를 통해서 그가 공중에서 3바퀴반을 도는 “트리플악셀”이라는 묘기를 보면서 정말 에술이다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연기를 하기까지 그것이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난의 댓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의 신문기사를 보면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라고 합니다. 오전 8시 30분에 일어나 러닝으로 몸을 풀고 준비운동을 시작하여서 늦은 밤까지 하루에 8시간 이상의 고통스러운 연습의 시간을 순종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개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가문과 나라에 큰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스케이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면 결국 평생 그런 삶을 살고 마는 것입니다. 얻기 위해서는 뿌려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 공식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내가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겸손으로 심어야 합니다. 한번 두 번 심어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복을 얻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겸손의 순종의 댓가가 있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연무장에는 무사들의 경기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엇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주목하라 모방하라 반복하라”

저는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종의 삶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럴때 결국 우리는 주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우뚝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을 품고 매일 매일 반복하여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이라면 끝까지 순종하는 삶으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였을때에 우리 주님이 영광가운데서 높임을 받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십니다.여기 예수님께 무릎을 꿇는 세종류의 언급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천사입니다. 땅에 있는 자들은 모든 인간들입니다. 땅아래 있는 자들은 마귀와 귀신과 죽은 자들입니다.

11절에 보면 다음은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높아지는 귀한 일들이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를 높이고자 할때에는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낮추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쓰시고 복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천사 루시퍼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세상으로 내어쫓김을 당하엿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햇던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사울의 경우에는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어 점점 전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가면서 스스로 왕이 된 것처럼 자기를 과대평가하면서 결국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의 직무까지 스스로 왕의 권위로 대신하여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우면서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의 노획물들을 불살라 없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으로 좋은 것을 골라 취하는 불순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운 사울을 왕에서 폐하시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그렇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을 앞세우는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면서 정말 경게하고 쓰지 말아야 할 사람이 바로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을 교회 생각 교회 뜻보다 더 세우는 사람들은 같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리로 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에서 망조가 들어가는 시간을 보면 교만입니다.교만해지면 “드디어 망할때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흥하고 그 가정이 흥하고 기업이 잘되는 기준은 바로 흥할 때입니다.

제가 부목사일때  큰 공장을 방문할 때가 있었습니다.예배를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수위입니다. 방문을 하면 일단 차를 세우고 “어디서 왔느냐”“용건이 뭐냐” 묻는데 거의 반말입니다. 제가 젊어보인데다가 차도 소형차를 타고 다니니 문전박대하는 모양입니다. ‘사장님이 초청해서 왓습니다“ 하니까 사장실에 연락해서 확인을 합니다. 잠시후에 사장님이 ”목사님 오셨습니까?“ 얼마나 겸손하게 맞이하는지 모릅니다. 사장님도 이렇게 겸손한데  수위가 더 교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수위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수위에 불과한데 목에 힘주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아”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 줄 알아”라고 하면서 나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잠18:12에서 “사람의 마음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의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잠22:4 “겸손와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한 자로서 우리 모두가 교회와 세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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