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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수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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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 팔자가 어떻다.'라는 표현을 흔히 씁니다.
  여기서 '팔자(八字)'란 것은 아마 점쟁이들이 소위 사람 신수라는 것을 점칠 때 무슨 '사주팔자'라고 하는 여덟 글자를 쓰는 것에서 연유된 말인가 봅니다.
  그런 글자 따위에 무슨 신통력이 있겠습니까마는 미신에 빠진 사람들은 여기에 자기 온 인생이 다 걸려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자신의 앞날이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이 갑자기 재산이나 지위 따위를 얻어서 그 인생이 현재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로 갑자기 바뀌게 되는 것을 두고 흔히 '팔자를 고친다.'는 말을 흔히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미신적인 표현이므로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런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워낙 흔히 쓰는 말이고 또 그런 의미를 그처럼 간단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할 만한 다른 적당한 우리나라말을 찾기 어려운 까닭에 여기서 그런 불신자의 속된 표현을 잠시만 빌리자면, 그야말로 팔자를 고쳐도 단단히 고친 사람이 바로 라합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원래는 가나안 민족의 기생에 불과했던 그녀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유명 여인들 중에 하나가 되었으니, 자기 인생이 이처럼 제일 밑바닥에서 최고의 단계로 한 순간에 격상된 사람은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달리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과연 라합으로 하여금 그처럼 극적인 인생 도약을 이루게 했던 믿음이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오늘날 역시 사람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변화되는 기적적인 일은 이 신앙세계에서 과연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1.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신앙이 세상에 속했던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격상시켜 줍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 /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이전에 먼저 정탐꾼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들어가서 유숙하게 된 곳이 마침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기생'이라고 하니까 좀 완곡하게 들리기도 하고 혹 옛날의 무슨 '주막집 여주인' 정도로 연상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히브리서나 야고보서에서 '포르네(porne)'라고 칭하고 있듯이 분명히 '창녀'라는 단어입니다.
  정탐들은 아마도 그처럼 여러 남자들이 출입하고 있는 곳이 사람의 눈을 가장 피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보는 당장 여리고 왕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 같은 데에 보면 "집 벽 안에서 하는 말들도 왕에게 들리고 골방 구석에서의 일도 왕은 다 보고 있다. 왕은 많은 눈과 귀가 있음이로다."고 말하고 있듯이, 당시의 왕들은 곳곳에 '자기의 많은 눈과 귀'가 될 스파이들을 상시로 배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해 올 것이 뻔한 상태에서는 더욱 긴장하면서 경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여리고 왕이 보낸 군인들로부터 추궁을 당하게 되었을 때 라합은 "그 사람들이 성밖으로 이미 나갔다."고 거짓말을 해서 그 정탐들을 보호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합의 의도는 좋았지만 어쨌든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히 잘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녀가 정직하게 말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정탐들을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9계명에서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는 '네 이웃을 해하려고'라는 악한 의도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적을 속이는 거짓 선전 방송이나 위장 내지는 기만전술 같은 것들은 결코 죄가 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정당한 작전일 뿐이며, 여기서 라합이 거짓말한 것 역시 꼭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사실 라합은 또 한술 더 떠서 "급히 따라 가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 군인들로 하여금 자기 집안을 수색할 생각조차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실로 지혜로운 전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5절에서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라합의 행위는 지극히 의로운 것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의문은 라합이 왜 그처럼 행동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기 민족과 조국을 배반하는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발각되면 당장 죽임당할 수밖에 없는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라합은 적국의 정탐꾼을 고발하여 포상금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자기 목숨을 걸고 도와주는 위험을 사서 자초했던 것입니까?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8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왕의 군사들을 유인하여 돌려보낸 후 라합은 그 정탐꾼들 앞에서 왜 자기가 이처럼 그들을 도와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라합은 그 첫마디에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리고성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을 라합이 이미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미 멀리 출애굽 때부터 지근거리에 있는 아모리 족속이 당한 일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두려운 일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은 라합만 들은 것이 아니라 모든 여리고 사람들이 다 듣고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미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벌벌 떨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결과 정탐꾼들은 원래 탐지하려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미 여리고 백성들 전체가 다 그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사기 저하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다른 정보를 정탐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여리고인들은 그저 자기 나라가 그처럼 강력한 민족 앞에 위험에 처해 있다는 그 점에 대해서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직 라합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실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말 놀랍게도, 그녀에게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라합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되어 있는 성 여리고를 의지하고 그 왕과 그 군대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리는 것이 당연한 줄로 판단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자기 인생의 기반이 되어 왔던 여리고성이지만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오직 진짜 능력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세상 왕에 대한 공포나 자기 백성들의 비난에 대한 걱정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컸던 까닭에 그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에 가서 라합은 멸망 받을 여리고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남북극의 빙산과 빙하들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 속도대로라면 앞으로 약 50년 이내에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는 섬나라들은 다 없어지고 말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 섬들의 표고라는 것이 제일 높은 곳이라 해 봐야 겨우 1미터 안팎 밖에 안 되는 형편이니, 해수가 조금만 더 높아지면 사람 발 디딜 영토가 문자 그대로 다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섬들을 조국이라고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린다면 결국 같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결국 그런 섬나라의 백성들은 자기네들을 받아 줄 다른 나라, 그런 넓은 마음과 능력을 동시에 발휘해 줄 강대국의 지도자를 찾아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미 그 끝이 눈에 뻔히 보이는 장망성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당하는 짐승' 같은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멸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이 망한다,' '지구의 종말이 이런저런 이유로 임박해 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세상을 멸망시키실 심판주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공해, 생태계 파괴, 혜성 충돌, 핵전쟁의 위험, 이런 소문에 그저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는' 백성이 아니라, 이 타락한 인생과 저주 받은 존재세계를 선악 간에 공의로써 심판하실 그 궁극적인 주권자 앞에서 벌벌 떨 줄 알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미련을 두거나 세상의 어떤 대통령이 나를 잘 살게 해 줄 것이라고 의뢰하는 자는 그 세상과 함께 멸망당할 한 날만 남아 있음을 깨닫고, 오직 상천하지에 유일한 대주재되신 여호와만을 경외하여 그 하나님께 인정받게 됨으로써, 어제까지만 해도 장망성에 살던 창녀 같은 죄인이 오늘 당장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가운데로 높이 들리움을 받는 이 놀라운 은혜를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유일하고도 확실한 언약인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신앙이 저주 아래에 있던 인생을 영생 구원의 반열로 끌어올려 줍니다.

  12절부터 14절 말씀에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편이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확신하여 그 정탐들을 도와 준 라합은 이제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명 보장을 약속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여호와로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고 그 정탐꾼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꼼짝없이 죽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가 그 정탐꾼들이 자기 집을 찾아오게 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도 살 길을 찾게 된 라합이었으니, 그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의 과정에서 그 어떤 오차조차도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처럼 간절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반드시 구원해 주기로 맹세하고 또 그 "표" 즉 어떤 언약의 증거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정탐들은 그런 요청에 대하여 "우리 생명을 걸고 당신과 당신 가족을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반드시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확약해 주었습니다.
  이 '인자와 진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할 때 창세기 등에서 여러 번 쓰인 단어입니다.
  구원에 대한 약속은 그것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 편에서는 호리라도 잘못되어서는 아니 될, 정말 1%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될 중대한 약속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중요한 언약을 당신의 '인자와 진실'로써 확증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에게는 그 구원 약속의 징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15절 이하 21절에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다급한 와중에서도 라합은 또 한 번 치밀성을 보여 줍니다.
  그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을 탈출한 후에도 바로 이스라엘 진쪽으로 가지 말고 추적자들이 포기할 때까지 사흘 동안 산 속에 비밀아지트를 만들고 숨어 있다가 돌아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일러 준 것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때로는 여자들이 더욱 침착하게 사리를 잘 판단해 내는 면모를 라합이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써 주는 라합에게 정탐꾼들이 약속해 준 '진실한 표'는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성벽에 달아내려 줄 때 사용했던 "붉은 줄"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벽은 두께가 4, 5미터 정도로 두꺼웠고 그 성벽 위의 넓은 폭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었는데, 라합의 집도 바로 그런 집이었습니다.
  기생의 집이었으니 그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 있는 것이 또 어울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부끄러운 영업하는데 편리했던 집터가 이제는 정탐꾼들 탈출시켜 주는데 실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그 성벽을 타고 내려갈 때 사용된 '붉은 줄'이 또한 라합에게도 자기 생명 구원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 '붉은 줄'을 매어 놓은 집 안에 있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될 것이지만 만약 누구라도 그 집 밖으로 나가면 죽어도 가하다는, 실로 엄중한 약속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물론 그 때까지 결코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라합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한번 하나님 경외하고 구원 약속 받았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은 그 정탐꾼들을 보내자말자 당장 그 '붉은 줄'을 자기 집 창문에 매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여리고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을 수 있고 추궁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미 여호와 경외의 신앙으로 다른 모든 두려움들을 떨쳐 버린 라합에게는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리고성 공략이 시작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은 반드시 그 '붉은 줄'이 창문에 매여 있는 집안에 머무르고 있어야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요 최대의 관건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표, 저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흐르는 십자가는 그 얼마나 '인자하고도 진실한' 표식입니까?
  벌레보다 못한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하신 성자까지 대신 죽게 해 주실 정도로 '인애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더 이상 무슨 '표'를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세전에 이미 택정해 놓으신 자들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을 무슨 구두(口頭)계약도 아니고 종이쪽지 한 장의 서약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빨간 피로 물들여진 십자가로써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보다 더 '진실한' 언약의 증거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부적이 사람의 생명 보호를 보장해 주는 표식이 될 수 있으며, 면죄부가 사람의 영생 구원을 약속해 주는 증거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인자하고도 진실한 표식인 십자가만을 붙들고 바로 그 밑에서, 그 십자가가 세워진 동산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라합이 언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로 침공해 올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지 그 날자는 알 수 없으니, 한시라도 그 십자가를 떠나지 않고 살아야 할 뿐입니다.

  그저 주일날만 잠시 십자가 밑에 나아왔다가 엿새 동안에는 여리고성 여기저기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는 큰 일 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 얻었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매일 매 순간마다 내 심령은 이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내 생활은 이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서만 영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십자가 밑에 꼭 붙어 있지만 내 자식은 아직 자라나는 아이니까 좀 마음대로 살도록 해 두었다가 나중에 대학 졸업하게 되면 그때 가서 십자가 밑으로 부르면 되겠지.' - 부르게 되기 전에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는 일이거니와, 또 그 자식이 머리 커지고 난 후에는 아무리 부모가 불러도 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야 자식 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분이니까 믿으면 좋고 안 믿으면 할 수 없지.' - 적어도 진짜 효성 있는 자식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언제 세상 떠나시게 될지 모르니 더욱 한시라도 빨리 십자가 밑으로 모셔 와야 하고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십자가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도록 부모님의 예배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자식 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최후 승리를 얻는 그날까지 주의 십자가만을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를 붙드는' 이것 외에는 지옥 영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살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신다는 이 은혜로운 구원의 약속을 일단 믿고 받았으면, 우리에게는 이제 남은 신앙생활 중에 어떻게 휴가나 외출을 바라고 한눈 팔 여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 한시라도 이 십자가 밑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오직 그 날을 위하여 깨어서 기다림으로써, 당연히 같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저주의 자리로부터 구원함을 얻고 저 천국의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청받는 신부로 격상되는 이 큰 축복을 꼭 빠짐없이 함께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한갓 이방민족의 창녀에 불과했던 라합은 하루아침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들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위치로까지 높이 들리워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개종한 라합은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그녀에게서 태어난 보아스는 바로 다윗 왕의 조상이며 멀리 예수님의 선조가 되었고, 더구나 예수님의 족보에 딱 네 명만 나오는 여인들 중에 바로 이 라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녀가 졸지에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을 올려놓게 되었으니, 정말 인생이 바뀌어도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며, 어떻게 그렇게 천한 신분에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자리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서양식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신데렐라 스토리, 구박과 설움 속에서 자라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공주가 된 격이겠지만, 사실을 따져 보자면 라합에게 일어난 일이 어디 신데렐라 정도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이 엄청난 기적적인 인생 도약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의 언약을 붙드는 믿음,' 그것 하나만 가지고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1절은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그녀를 위대한 신앙 선조들의 반열에 그 이름을 나란히 올려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팔자'를 탓하고 그 '팔자를 고치기' 위하여 온갖 헛수고와 허탄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을 한탄하며 뭔가 하루아침에 자기인생이 극적으로 향상되기를 바라는 헛된 꿈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권을 사 놓고 그날 밤에 돼지꿈을 꾸려고 애를 쓰고, 남편이 국회의원이 되게 해 달라고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자기네 말마따나 그런 '비참한 팔자'에서 평생토록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저주 받은 인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며 이미 망하도록 정해져 있는 세상과 멍에를 같이 메고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미련을 가지고 그 안에 남아 있으면 결국 같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인생 탈바꿈은 그런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죄악 세상 가운데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게 되는 것, 지옥멸망이 임박한 장망성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어 영원한 천국구원을 누리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놀랍고도 놀라운 인생 격상입니다.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신앙만이, 한번 붙잡은 구원의 기회를 그 언약의 징표를 붙들어 매고 끝까지 기다리는 신앙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크나큰 변환, 엄청난 도약을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차피 망하게 되어 있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나라와 인생을 심판하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우리에게 주신 이 인자와 진실의 언약인 십자가만을 소망함으로써, 비록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영화로운 반열에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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