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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참된 섬김입니까?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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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참된 섬김입니까? 막10:35-45.

요즘, 교회 공사로 인해 불편함이 많은 대도 넉넉히 견디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니 큰 기쁨이 있습니다. 올해도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 있다면, 아름다운 부흥을 경험하고, 좀더 성숙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모두가 열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새들백 교회에 릭 워렌 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보면, 그 서론에서 저자는 파도타기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아주 설득력 있는 말로 교회부흥과 건강성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파도타기 선수가 아무리 파도타기를 잘 해도 파도 그 자체를 만들 수 없듯이 목사나 또는 재주 많고 실력 있고 믿음 좋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흥 그 자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 파도의 물결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만 보내주실 수 있는 것처럼, 부흥의 물결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파도가 거칠수록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위협적이고 위험할 수 있지만, 파도타기 선수들, 그 중에서도 실력 있는 선수들에게는 거칠수록, 클수록 파도타기의 묘미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위기는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교회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이고 세째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흥의 물결을 보내 주셔도 그 기회를 놓치는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넷째는, 파도타기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것'처럼,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균형을 잡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균형 잡힌 신앙, 균형 잡힌 생각,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의 관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생각을 열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이론, 새로운 해석, 새로운 전략,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 속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음성과 메시지,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내 생각과 전혀 반대가 되는 주장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며 그 주장의 장점과 논지를 잘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의 말보다는 오히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서 더 많은 깨달음을 가질 때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참된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면, 정말로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실 때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서 혹시 예수님을 통해 해방되어 새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아니라 일개 정치 지도자로 오해했던 겁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장차 새 나라의 왕이 되시면 자기들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암암리에 자리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파워 게임'이 있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가 예수님께 공식적으로 청원을 합니다. 37절에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왕 되시면 자기 두 형제를 예수님의 최 측근으로 세워달라는 겁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마20:20에 보면 아예 어머니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인데,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자매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육신 적으로 예수님과 이종 사촌 지간입니다. 자기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요즘으로 말하면 인척 관계를 내세워 줄을 댄 겁니다.

다른 제자들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른 동료들을 제치고서라도, 누르고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들만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사악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텐데 그걸 모르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 살든 자기들만 잘되면 상관없다는 자세입니다. 이런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본 열 제자들의 반응은 또 어떠했습니까? 41절에 보십시오."열 제자가 듣고 야보고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기거늘 " 결국 열 두 사람 모두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구원하시기 위해 가시는 주님의 그 사랑, 그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로가 더 취하려고 하고 더 얻으려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 제자들에게 주님은 갈등을 넘어서서 '섬김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의 공동체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왜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섬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1. 우리 주께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결론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45절에서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내어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심으로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제자들의 주인과 스승으로서 친히 제자들에게 발을 씻김 받으셔야 마땅한 그분이 오히려 제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무릎을 꿇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주님은 요한13:14-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옛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를 시무 하셨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섬김의 삶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장로님께서 마산에 있는 문창 교회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주기철 목사님을 자기교회로 청빙해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오산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노 장로님은 젊은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 목사님의 말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전에는 목사님이 학생이셨고 제가 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귀하신 종이 되었고, 저는 그 종을 받들어 섬기는 장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편좌하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노 장로님의 믿음에서 나오는 섬김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의 겸손에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의 권유에 따라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게 되셨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습니다. 장로님은 부랴부랴 교회를 뛰어왔지만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서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다 마시고 장로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노 장로님에게, 그것도 옛 스승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금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장로님께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울먹거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울먹거리는 장로님의 기도를 듣고 모두가 울었습니다.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울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똑같이 칭송을 했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로다." 이 산정현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한국의 위대한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2.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42절을 보면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관한다"는 말을 표준 새 번역 개정판에서는 "마구 내리 누르고"라고 번역하였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은 "세도를 부린다"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동 번역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리더십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하고 내리 누르고,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요13:6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살아온 바에 의하면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두십시오. 오히려 제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힘이 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당연지사이고, 없는 자가 가진 자 앞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섬김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원하시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분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의 생명까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섬김은 세상이 하는 방식과 다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적인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으면 결단코 예수님과 같은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섬기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즐거운 섬김, 자발적인 섬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 적인 가치관에 의해 병들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점검해볼 수 있습니까?

섬길 때 기쁨이 없으면 병든 것입니다. "나보다 낮은 사람이 나를 섬겨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내가 섬기려고 하니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는 자가 당연히 있는 사람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는데, 내가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겠습니까? 왜 요즘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습니까? 왜 짜증스럽고 왜 불만이 쌓이고, 왜 원망스럽고 남이 미워지고 왜 용서가 안 됩니까? 정말 낮아지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 아닙니까? 이기주의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기주의가 행복을 보장받는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싫다는데 왜 그래?" "내가 싫으면 안 해" 이런 말들을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뱉고 그 말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못 해", "안 해", "그럴 순 없어" 이렇게 말하다보니, 왠지 세상사는 재미도 없고 항상 괴롭고 슬프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 더욱 답답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 적인 가치관을 버리세요. 주님이 가르쳐주신 가치관은 겸손한 자가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적인 가치관을 나를 지배하게 되면, 이기주의자밖에 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겸손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삶이 바뀝니다. 삶에 희망이 넘칩니다. 삶이 즐거워집니다. 겸손과 섬김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한번은 세계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 토크쇼에서 그를 좋아하는 한 펜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번스타인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가 있다면 그 악기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재치 있는 말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 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1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과 똑 같은 열정을 갖고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프렌치 호른이나 플루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 원치 않는다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하지 안겠어요?"

제2바이올린은 화려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남이 알아주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무대 뒤에선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바이올린이 빛날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 제2바이올린입니다. 섬김도 그렇습니다. 내가 빛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대 뒤에 조연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대 뒤에 수고와 희생의 섬김이 있기에 좋은 작품이 만들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43-44절에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고난 후에야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설은 우리가 죽기로 결심하는 순간 우리가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동안 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았던 '헨리 나우웬'을 아실 것입니다. 교수의 길을 걷고 있던 헨리 나우엔에게 있어서 하바드 대학 교수직은 아마도 그가 추구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높은 곳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절정에서 그는 어느 날 홀연히 하바드 교수직을 내려놓고 카나다 토론토의 데이 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소수의 정서 장애자들을 섬기는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적어도 캐리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자리, 이 공동체에서 영성작가 헨리 나우엔이 다시 태어납니다. 이 공동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글들이 쓰여지면서 그는 이 작은 공동체를 넘어서서 가치 있는 인생을 추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아름다운 저작들을 선물로 남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리더십의 길은 세상이 시사하는 방향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십자가로 직결되는 저 낮은 곳을 향한 움직임인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자학적이고 자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첫 사랑을 경험하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예수를 따라가는 길은 세상은 결코 알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향한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은 힘과 지배의 지도력이 아닌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신 예수가 보여주신 스스로를 비우시고 낮추시는 무력함과 겸손의 길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참된 기독교적 지도력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높아지기를 구하는 자마다 먼저 낮아짐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법칙을 쫓아 살아서 세상을 변화시켜야합니다. 다르게 살면 핍박이 올 수도 있지만 겁낼 것 없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주위 환경의 어려움 가운데 한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하소연을 듣고 난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부엌에 갔습니다. 냄비 세 개를 난로 위에 얹어놓고 한 그릇에는 당근, 한 그릇에는 생 달걀, 한 그릇에는 커피 원두 콩을 넣고 물을 붇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당근은 흐물흐물해졌습니다. 계란은 삶아져서 딱딱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커피 원두 콩을 넣고 끓인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향기 나는 커피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가르쳐주려고 하는 교훈을 무엇입니까? 끓는 물 같은 역경이 닥쳐올 때에 어느 사람은 당근처럼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계란처럼 강퍅해지지만 성도들은 커피 원두 콩처럼 역경을 향내나는 커피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잠시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면 성경은 섬기는 자들에게 영광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보편적인 실망이 있다면 섬김의 보상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노력의 대가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좌절하고 원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이런 약속된 영광을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보상은 내가(예수님이) 임의로 주기보다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아버지가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금은 묵묵히 고난을 견디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37절에 영광의 자리를 보장하라는 말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먼저 마실 잔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먼저 마신 고난의 잔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는 함께 일하며 섬기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섬기는 공동체"의 소망을 안고 믿음의 돛을 달고 세상을 향해 출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 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함께 일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 동성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우리는 소유하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과 교회와 이웃을, 섬길 때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섬김의 비밀입니다. 이 섬김의 비밀이 우리의 인생을 더욱 풍성케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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