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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 (겔 44:23~26, 행 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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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점점 남성들의 설자리가 작아지고 여성들의 세상이 되는 요즘에 굳건한 가정의 제사장 되시고 남자답게 굳센 믿음을 가진 남선교회 회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남선교회들이 많은 회원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이웃을 섬기는 남선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쯧쯧쯧, 아담아, 푹 자거라. 아마 오늘이 네가 푹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남성들은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일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세상을 접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드는 일의 몫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들이란 하나님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 두 개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페리그리니’(perigrini) 즉 지상에 거주하는 이방인이고 두 세계에 대한 충성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주의 깊게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것은 저 나라를 위하여 이 나라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세계가 끄는 힘을 동시에 느낍니다. 인간은 그 두 가지의 기묘한 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운데 끼여 있습니다. 진창에서 뒹구는 천사요, 날기를 시도하는 포유동물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반대쪽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로 묘사했습니다.

  성경에는 미묘하고 통합적인 실재를 성과 속, 자연과 초자연으로 구분하지 않고 한가지로 제시합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 자연과 초자연은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투스는 영적인 활동과 세속적인 활동 간의 인위적 담을 허물기 위하여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기도이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잘 분별하고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적 지혜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겔 44:23에는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근본 생각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왕따를 당합니다. 세상들이 가는 길과는 반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고 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사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6:3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8에는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한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기에 마태복음 7:6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말씀이 레위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학개 2:12에는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다 거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에게는 ‘코셔’(Kosh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별하여 만든 것들을 말합니다. 채소나 과일 그리고 모든 제품에 코셔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처음 재배할 때부터 특별하게 성별하여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품들입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와 자세가 모든 성도들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거룩의 뿌리는 규범이나 원칙이나 기준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열정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가 다른 교회를 찾아가다가 찾지 못하여 길을 물어보려고 복덕방에 들어갔습니다. 복덕방 주인은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마나 친절하게 또박또박 잘 가르쳐주는지 목사는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서 그 주인을 교회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전도하였습니다. “당신은 친절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꼭 예수만 믿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전도를 다 하고 목사가 복덕방을 나오자 다시 따라 나와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복덕방 주인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더랍니다.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천국에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거룩이 성장하면서 유혹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 누구도 유혹받지 않을 만큼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거룩성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거룩한 생각, 거룩한 묵상, 거룩한 생활을 지향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경건한 거룩은 관계의 거룩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게 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죄는 달콤하지만 뱃속에 들어가서는 쓴 것으로 변합니다. 반면에 거룩은 처음에는 쓰지만 나중에는 단 것으로 변합니다.

  출애굽기 20:11에는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저의 모친의 엄격한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은 생활의 철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절대로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부를 조금 오랫동안 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15년을 더 공부했으니 제법 했지요. 그러나 단 하루도 주일에 공부한 적 없습니다. 주일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나님 보다 어머니 얼굴이 아른 거려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시험치고 논문 쓸 때는 정말 바빴지만 그래도 주일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에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12시가 넘으면 그냥 책을 덮어놓고 잤습니다. 주일 밤에 공부할 일이 있으면 12시까지는 성경을 보다가 12시가 되면 책을 펴고 공부했습니다. 문자적인 성수주일을 하느라고 고생했고 주일에 공부를 안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공부할 시간도 적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 못하지 않고 박사학위 공부할 때도 12명 중에 두 번째로 일찍 학위를 받았습니다. 거룩의 연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거룩의 연습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에 축복이 됩니다.

둘째, 속된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15에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속된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을 때에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속되다고 한 것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속된 것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 10:10에는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고 하십니다. 선민으로 거룩한 것만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복음으로 옮겼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은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7:18에는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속된 것을 거룩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었나, 무엇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한 목적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한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선입니다.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닙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일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초’에는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보면 맑고 거룩한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면 사람이 속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룩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4:4-5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거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타락하여 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래 사람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하여 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복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잠이 거룩한 잠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이 거룩한 일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므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순간이 거룩한 순간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묵상주의자들 간혹 성과 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거룩하고 저것은 속되다고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속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스리랑카 어느 마을의 선교사에게 주민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놀라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라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하지 못한 삶이 결국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존 웨슬리는 “사회의 거룩함 외에 거룩함이란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개인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현세에 가장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입니다.

  비행기를 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불신자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책에 적힌 얘기를 다 믿수?” “예, 믿지요.” “고래 뱃속에 들어간 사람 이야기도 아슈?” “알지요. 요나이지요”. “사람이 고기 뱃속에서 살 수 있다고 보시오?” “천당에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요.” “그 사람이 천당에 없다면 어떡할꺼요?”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 없이 보는 성경이 거룩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는 일이 거룩할 리가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삶입니다.

  “I am a gentleman”을 한국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요즘 아이들은 ‘신사임당’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사가 무엇입니까? 신사는 양복이나 구두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사는 마음의 포용력입니다.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아멘’하는 마음이 신사입니다. 신사는 모든 속된 것을 거룩하게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속의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변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신사이고, 참 신사의 자세입니다.

결론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인 에릭 리들은 1912년 올림픽의 영국대표 단거리 선수였습니다. 그는 100미터 예선 경기가 있는 날이 주일이므로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영국민의 엄청난 비난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00미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미터에서 우승하였습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의 여류 국수 타이틀 보유자인 조혜연양은 세계 여자 바둑 최강전이 주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출전 포기를 선언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많은 비난도 있었지만 조혜연양은 아직도 최강의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잘 되게 하십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세요. 속된 것을 물리치는 용기를 가지세요.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속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성도, 거룩한 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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