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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되고 확실한 비전 (단 2: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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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스트레스를 풀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한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자기 손에 넣고자 열심히 달려가는 인생을 경주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인생이고, 그것에 집착하며 손에 쥐려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손에 쥘 듯 할 때마다 가로막는 세상의 각종 환경과 요구들의 압박에 괴로워합니다. 서로 자기 손에 무엇인가를 넣으려고 무섭게 다가오는 주변의 다양한 환경과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을 의식할 때마다 두려워 떨며,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다양한 문화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문화들은 일반적으로 “3S문화”라고 불려지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등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3S문화”가 스트레스를 풀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해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새로운 세대는 “3S족”이라고 불리는 “싱글(Single), 안전(Safety),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의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 수 없으므로 그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가족과도 떨어져 싱글로 혼자 살아가고자 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공동체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만족에 도취 되고자 합니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 3S족의 삶을 살아가지만 스트레스 속에서 누리던 작은 행복마저 사라지고 “외로움과 고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며, 위로받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문화가 “3S문화”입니다.

최근에 부각되는 “3S문화”는 “스트리트(Street), 스포티브(Sportive), 섹시(Sexy)” 문화입니다. 거리로 뛰어나가 서로의 연대를 과시하며, 건강과 레저를 통해 자신을 달래고자 하고, 개성 있는 자기표현을 통해 세상 거리의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노력합니다. 과거에는 “공동체적인 3S문화”였지만 지금은 “3S족”의 문제해결을 위한 “개인적인 3S문화”입니다. 진정한 연합과 교제가 없는 거리문화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스트레스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을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스트레스를 피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지도 않고, 피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자기 혼자서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려는 싸움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최근에 거론되는 “3S철학”은 “안전(Safety), 느림(Slowness), 단순(Simplicity)”의 철학입니다. 스트레스와 싸우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으며 그 영향을 최소로 줄이려는 동양철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운동입니다. 그러나 “3S” 운동도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지난 3월 6일에 포항공대 김경태 교수 연구팀이 스트레스 호르몬인 카테콜라민이 꾸준히 증가하기만 할 뿐 줄지 않는 현상인 “자극 의존성 분비증가”의 메커니즘을 규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호르몬은 병원균이 침입하거나 상처가 나는 등 외부 자극이 발생하면 대체로 분비량이 증가하다가 병원균 퇴치 등 자기 역할을 끝내면 분비량이 다시 줄어들지만 카테콜라민은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분비량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트레스는 피하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항상 스트레스를 찾아가며 스트레스를 만들어 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자기 손에 쥐려는 인생은 일생동안 스트레스를 만들고, 스트레스를 찾아다니는 인생입니다. 그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는 인생만이 스트레스를 만들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욕심은 그의 손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쥐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모습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2. 손에 쥐는 왕권의 스트레스와 손을 펼치는 왕권의 평강이 존재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느브갓네살 왕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당대 최고의 왕권을 행사하던 바벨론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왕권 안에 바벨론 제국과 전 세계를 잡아두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큰 신상의 꿈은 자신의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자신의 능력으로 다룰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느브갓네살 왕의 스트레스였고, 고통이었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풀 수도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의 왕권의 한계, 왕권의 무능, 왕권의 결말 등을 보여주시며 그의 왕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왕권을 쥐고 계신 분이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단 2:44는 “이 열왕의 때에”라고 말씀하시는데, 꿈에 보인 네 개의 왕국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제국의 왕권이 몰락할 때 새로운 왕권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열왕의 때”란 직접적으로 “열 발가락처럼 나누어진 하나의 왕국인 로마시대”를 말합니다. 새로운 왕권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몰고 올 왕권입니다.

그 왕권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입니다. 단 2:44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로마를 멸망시키는 나라입니다. 로마가 멸망시킨 헬라 제국을 멸망시키는 나라이며, 헬라가 멸망시킨 메대와 바사를 멸망시키는 나라입니다. 결국 그 나라는 메대와 바사에 의해 멸망할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나라입니다. 즉 모든 제국 위에 뛰어난 왕국의 왕권입니다.

단 2:44는 그 나라의 네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로,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둘째로,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라고 소개합니다. 그 어떤 세력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꺾고 그 국권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셋째로,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라고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꿈에 보인 네 왕국을 멸하고 정복합니다. 넷째로, “영원히 설 것이라”라고 소개합니다.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 예언대로 로마 제국의 멸망의 시기인 2천여 년 전에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누구도 그 나라의 왕권을 빼앗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모든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영원히 서 있을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은 느브갓네살이 실질적으로 원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벨론 왕권은 그와 정 반대로 망하게 될 왕권이었고, 메대와 바사에게 빼앗길 왕권이었으며, 패배당하여 사라질 왕권이었던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지금까지 그러한 왕권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견고히 자신의 손에 움켜쥐고자 하였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손에 쥘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예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들려는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과 번민의 밤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그의 왕권을 손에서 내려놓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권 밑에 맡기기만 하면 모든 고통과 고민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손을 펴서 자신이 쥐고 있던 왕권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손에 쥐는 왕권”은 스트레스를 몰고 오지만, “손을 펼치는 왕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몰고 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합니다. 손에 쥐고자 달려가고 붙잡는 인생은 괴로운 인생이며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것을 붙잡고 있어도 괴로운 인생이며, 붙잡으러 달려가도 괴로운 인생입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모든 것을 붙잡아 보았지만 헛되고 헛된 인생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펼치며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립니다.

우리는 느브갓네살 왕과 같이 자신의 왕권을 끝까지 붙들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최고의 왕이 되어 살아가려는 죄악된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멸망당하고 사라질 왕권을 붙들고 살아가려는 인생은 스트레스의 연속일 뿐입니다. 정치적인 왕권이나 물질적인 왕권이나 학문적인 왕권이나 모두 한결같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왕권도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 환경과 요구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없는 왕권입니다. 그 왕권을 쥘수록 스트레스입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그의 왕권을 하나님의 왕권 아래 내려놓도록 초청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왕권의 집착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해 그 손을 펼치도록 초청합니다. 자신의 왕권을 쥔 손을 하나님 앞에 펼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손과 그 왕권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며, 영원히 변치 않으며,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의 왕권 밑에 맡겨진 인생이 평강을 누리는 행복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인생을 손에 쥐는 왕권의 스트레스와 손을 펼치는 왕권의 평강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가정, 학교, 직장, 미래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왕권의 인도를 받으며, 그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우리에게 나타나 주신 참되고 확실한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으로의 초청은 참되고 확실한 비전으로의 초청입니다. 단 2:45에서 다니엘은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 왕에게 보여주신 꿈은 첫째로 뜨인 돌이 철, 놋, 진흙, 은, 금을 부숴뜨린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한 나라가 모든 나라를 멸하고 그 위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왕에게 꿈을 보여 주신 이유가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실질적으로는 “심판 선언”이었지만 “심판”이라는 표현 대신에 “장래 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왕을 초청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국만이 영원히 거하는 왕국이라는 비전 선포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왕국은 흥했다가 사라지는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왕국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되고 확실한 비전입니다. 확실히 현실로 다가 올 장래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되고 확실한 비전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확실한 나라가 2천여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 나라는 첫째, “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둘째, “빼앗기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셋째, “모든 나라를 멸할 나라”입니다. 모든 나라를 영원히 지배 할 유일한 나라입니다. 넷째,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밑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기고 의지함으로써 안식과 평강을 누리는 참되고 확실한 비전을 품은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1:12에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왕권을 아는 확신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이겼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왕권을 최고의 왕권으로 알고 인정하며 확신하고, 그 왕권을 향하여 손을 펴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의탁할 때 모든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평강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믿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확신의 정도에 따라 평강과 스트레스가 다양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상에서 우리가 쥐고 있는 모든 왕권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왕권 밑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소유, 모든 사역, 모든 결과, 모든 생명까지도 그리스도의 왕권 밑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 속에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사회 책임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각종 타락하고 부패한 병적인 문화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 스트레스가 축적되며 고통의 세월을 보냅니다. 또는 그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하지만 더욱 더 심각한 영적, 정신적 질병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그러한 느브갓네살 왕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소개하며 천국 백성으로 초청했던 것처럼 이 땅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소개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왕권을 자기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왕권을 자신의 능력으로 쥐려고 하였습니다. 그 왕권을 좇아 온 인생이었고, 그 왕권을 잡은 인생이었으며, 그 왕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며,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왕권을 쥐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잡아도 평강은 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자신이 왕이 되는 인생은 손에 쥐고 있는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손에 쥐려는 인생은 스트레스의 터널을 지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의지하지 인생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책임은 고통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스트레스 속에서 신음하며 다니엘과 같은 위로자를 기다립니다. 다니엘의 초청과 같은 소망의 빛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되고 확실한 비전을 품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처럼 위로자와 소망의 사자로서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그 왕권 밑에 그들의 세상 왕권을 내려놓도록 초청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책임은 하나님의 기쁨이며 우리의 기쁨으로서 왕적인 사회 책임입니다.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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