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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가? (슥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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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의 본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스가랴는 지금 여섯 번째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환상입니다.
그가 보았던 두루마리는 굉장히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길이가 20규빗, 넓이가 10규빗입니다.
한 규빗을 대강 45cm 정도라고 본다면, 가로 세로가 10×5m에 육박하는 대단히 큰 두루마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루마리하면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율법책입니다.
당시에는 성경말씀이 양피로 만든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때문에 성경책의 또다른 이름이 두루마리였습니다.(히10:7, 렘36:2,4,6,14, 겔2:9) 그런데 그 두루마리-율법책-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70인경에서는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아니라 '날아가는 낫'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왜 이 부분을 '날아가는 낫'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추측컨대 스가랴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책을 보면서 마치 날아가는 낫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고, 무섭고, 떨리는 심정이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날아가는 낫'이라고 번역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내가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슥5:2)라는 말속에는 그 두루마리의 크기, 율법책이라는독특성, 날아간다는 신비로움과 두려움, 경이로움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날아가는 그 두루마리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나요?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리라"(슥5:3~4)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는 자들에 대한 단호한 심판이 적혀 있습니다.
몸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 죄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적질과 거짓맹세입니다. 하필이면 왜 이 두가지 죄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까요? 스가랴와 동시대에 쓰인 책이 있는데 바로 말라기입니다.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이것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죄악 중에서 왜 도적질을 언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도적질은 단순히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거짓맹세를 언급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의 땅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멋진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돌아가면 성전을 다시 재건하겠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다짐과 결심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저주'(3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백성들을 향한 '저주'가 하나님의 본심인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슥5:1~2에서 강조되는 것은 '날아가는'이라는 단어입니다.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책이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율법책은 한 두루마리에 다 기록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많은 두루마리 중 하나의 두루마리만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아가는 하나의 두루마리에는 '저주' 즉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그 저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저주'는 신27:15~26, 28:15~68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날아간다'는 단어가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어디에서, 어디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저주가 기록된 두루마리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린 인간을 향해야 할 그 심판과 저주가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홍수속에서 살아남은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무지개 언약일까요?
무지개의 모양은 활과 흡사합니다. 그 활에 화살을 장착한 후, 활시위를 당기면 화살은 하늘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갚고, 인간을 심판하고, 저주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대신 저주를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한국영화사상 최다관객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면 연산군이 여장으로 분장한 공길이와 함께 사냥놀이를 갑니다.
광대들을 사냥감으로 도망치게 하고, 솜으로 감싼 화살을 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왕의 공신들은 공길이를 진짜 화살로 죽이려 합니다.
쫓고 쫓기다가 더 이상 화살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펼쳐졌고, 공신들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공길의 가슴을 향했는데 그 순간 육갑이라는 광대가 자기 몸을 날려 화살을 대신 맞아 죽습니다.
공길이는 육갑이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책 중에서 저주가 기록된 부분의 두루마리가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들을 주님이 가슴으로 맞고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두렵고, 무섭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중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한 농부가 아들을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웃 농부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을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핀잔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키우고 있소"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도 한 차원 높습니다.
인간이 죄악의 올무에 빠져 고통당할 때 독생자를 보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병든 자, 낙심한 자, 고통당하는 자, 방황하는 자를 불러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저주의 두루마리를 날려버리시는 하나님, 아니 그 저주를 친히 가슴으로 맞으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 부분에 흔들림이 없이 주를 바라보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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