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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정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시 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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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사람 구시가 한 말을 듣고 다윗이 주 앞에서 부른 노래.” 이것이 시편 7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람 구시가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를 찾아본다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와 요단으로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마을에서 나왔는데, 그는 사울 집안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로서 시므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나오면서 줄곧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영영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

아니면, 훨씬 앞으로 가서, 다윗이 바울 왕에게 박해를 받을 때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을 모함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의 결백함을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요청하는 것이 시편 7편의 배경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본 시편은 다윗이 어렵고, 힘들고, 그것보다도 억울하고 억울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시길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경을 겪을 때 있습니다. 더욱이 자기는 그래도 의롭게 산다고 했는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나름대로 착하게 산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당하는 고통이라면…….

2절,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악한 세력의 파괴력은 의롭게 사는 자들을 환란 속으로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까지도 파멸케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까지도 홀릴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난 예수 믿는다.” “난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파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을 대적하며, 의인들에 대하여 흉계를 꾸미며, 그 생명까지도 죽입니다.

마태복음 23:29-36, 대적자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박해했고, 예레미야를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죽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은 공격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람이라며 감정이 있으니까 억울한 일 당하면 화를 냅니다. 더욱이 신앙생활 제대로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되는 일은 없고, 오히려 억울한 일 당하면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을 팽개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별 거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도 예수 믿어도 별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목표인 것입니다.
다윗이 입장에서 보면 그래요.
다윗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시켜 다윗의 머리에 기름 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피해 정처 없이 쫓겨 다녀야 한다는 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왕으로 세워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 고통이 뭡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1절,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나를 뒤쫓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건져주십시오.”
그래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사람들조차 파멸시키려 합니다. 인간의 지식, 인간의 교양,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대적해서 이기는 길은 오직 주 나의 하나님뿐인 것을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택함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할지라도 대적자들 앞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돈 버는 거. 많이 벌 때도 있고 못 벌 때도 있어요. 세상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 하나님의 일도 세상일 하듯이 한다. 늘 하는 말이 “이 다음에”, “좀 여유가 생기면”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의 최선을 원하십니다. 더더욱 예수 믿는다는 것, 그것은 곧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나중에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결정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 안 믿으므로 생명이 없으면 나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의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가장 큰 기쁨이 뭡니까?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능력을 경험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면 지금 여기서,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나를 뒤쫓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구언하여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아주 다정한 어머니 같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좋을 때나 궂은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았습니다. 사울 왕의 질투로 인해 아무 이유도 없이 도망 다니면서도 그가 위로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셨고,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바로바로 응답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다윗뿐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간구와 호소에도 바로바로 응답 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한국교회, 어디나 다 그렇겠지만 교회나 교인들의 자랑은 “몇 만 명 모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이 모인다고 나쁠 것 없습니다. 그게 비난거리는 아닙니다. 적게 모인다고 부끄러울 것도, 그렇다고 좋을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많이 모였다고 그 자체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많이 모였든, 적게 모였든, 그 자리에 앉은 나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남 다른.” ‘각별하다’고 하지요.
목사는 교인들 모두에게 있어 “나의 목사님”입니다. 그러나 각별하다는 것은 그냥 진주제일 교회를 담임하기에 “우리 목사님” 정도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날 위해 늘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 그래서 나도 사랑하는 목사님. 만나서 차 한 잔 같이 마시고, 자장면이라도 함께 식사함으로 좋은 분. 그것이 각별한 사이입니다. 그렇게 그냥 우리 목사님보다 각별한 사이가 되면 말씀조차 더 은혜가 되는 거 아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각별한 사이입니까?
예수. 그 이름만 들어도 그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뛰어요?
예수. 그분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집니까?
예수. 그분이 사랑이 아무도 엄청나, 내 생명 다 하기까지 그분을 사랑하리라는 마음이 생겨요?
예수. 그분이 날 위해 생명 내 놓으셨는데, 그렇기에 나도 내 생명 내 모든 것 그분께 드리겠다는 결단이 있습니까?
정말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시라 믿습니까?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어요? 그렇기에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나를 뒤 쫓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방패(10절)라고 찬양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보다 하나님께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시니까, 그분은 나를 책망하시지만 또한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는 분이시니까. 더욱이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니까. 그래서 다윗은 대적자들이 사자처럼 자신을 찢어발기려는 그 상황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서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판단해 주시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자신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사람은 늘 자기를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은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하십니다.

여기서  또 하나,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에 내 자신의 그릇됨을 먼저 살펴보아야합니다.
3-5절, 다윗은,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했다면, 내가 불의한 뇌물을 받았거나, 화해한 다음에 모질게 앙갚음을 했거나, 내 적대자라고 하여 까닭 없이 그를 약탈했다면, 원수들이 나를 뒤쫓아 와서 내 생명 떨쳐서 땅에 짓 밝고, 내 영광 먼지 속에 뒹굴게 하여도 나는 좋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다윗과 같이 기도 할 수 있겠어요? 한 마디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내가 먼저 얻어맞아도 좋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까?
뇌물은 안 받았는지 몰라도 불의한 일은 했잖아요? 화해한 마음은커녕 화해도 못하고 늘 마음속에 앙갚음 할 생각 가지고 있잖아요? 약탈까지는 몰라도 내 이웃의 것을 욕심낸 적 있잖아요. 그런 우리가 다윗과 같이 기도 했다가는 의로우신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내 억울한 일 재판해 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9절에 보면, “악한자의 악행을 뿌리 뽑아 주시고, 의인에게는 마땅한 보상을 해 주십시오.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악한자입니까? 의로운 자 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속과 뱃속까지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신데 그분 앞에서 뭐라고 스스로를 대답하시겠습니까? 의인입니까? 악한자입니까?
그래요. 악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악한 자가 바로 우리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의인에게 주는 마땅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한 자이기에 뿌리째 뽑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사 의인되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위대한 일꾼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5:9,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죄가 있지요.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고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죄 없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게 된 것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공정하사 재판장이시오, 언제라도 악인을 벌하시는 분이시다.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으면 칼을 갈고 활을 당기셔서 심판을 준비하신다.”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러셨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설사 악한자라 할지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꾼 된 사도 바울께서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 그러나 그 역시 뉘우치고 주께로 돌아옴으로 해서 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신 것입니다.

세상은 힘이 판을 칩니다. 돈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다수가 판을 칩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과 다수가 곧 의로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 그것 때문에 약한 자나 가난한자, 소수의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억울함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억울함을 당한 자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 뿐 아니라 그 속 깊숙한 것까지 알고 계시는 그분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세상에는 억울함 당 한자 들이 넘쳐 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어떤 여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을 찾아 갔는데, 이 재판관이 불의한 사람이라, 아마도 뭔가 뇌물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줄 것을 주지 않으니 차일피일 재판을 미루었지요. 그래도 여인이 끈질기게 찾아갔더니 귀찮아서라도 그 여인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어요. 비유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기도는 끈질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인이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말하자면 그 여인은 억울한 일 당했던 것입니다. 여기, 불의한 재판관도 억울한 일을 풀어 주었다면, 공정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 있습니까? 답답한 일 있으세요? 의로운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 들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보세요.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 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애하여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모든 창조물,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데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화를 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뜻을 어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해롭게 합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주인의 책망은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만 버렸다는 것 그것은 열매도 없으면서 땅의 영양분만 소모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나무들이 자라서 열매 맺는 일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십니다. 죄에 대해, 악에 대해 분노하심이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일은, 이 하나님의 분노,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용서와 은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판이 아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멸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 “나는 주께서 행하시는 의를 감사하고, 가장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무슨 말 입니까? 나의 주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겁니다. 정당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고 나의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약속들입니다. 그렇게 약속된 모든 것들이 오늘 여기서 경험하는 것 그것이 체험인 것입니다. 말도 안 되지요. 그러나 그것이 체험입니다.
김 아무개의 생일이 5월 1일이라고 합시다. 김 아무개가 그날 자기 집에 오라고 초청을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생일음식을 먹은 겁니까? 못 먹은 겁니까?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못 먹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먹었습니다. 언제? 지금 여기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김 아무개를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까마득한 미래라 해도 오늘 여기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믿음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축원합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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