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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인의 자세 (마 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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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마지막에서 “추수할 일꾼”을 간청하도록 명하신 예수님은 10장에서는 그 일을 위해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고 파송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심정과 능력으로 사역하며, 동시에 예수님과 같은 거절을 경험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은 ‘전도하는 자세’와 ‘박해 받는 자세’로 구별됩니다. 오늘은 전도인의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중에서 특별히 열둘을 선별하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1) 주셨습니다. 열두 명의 임무는 9:35절에 요약된 예수님의 사역을 동일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았습니다. 2절에서 이들을 “열두 사도”라고 칭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사도’라는 단어가 유일하게 이 구절에만 나타납니다. 열두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가 예수님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란 용어는 권한을 부여받아서 동일한 일을 수행하는 전권대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는 예수님께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이로서 그 가르침과 행동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과 거의 동일한 권위가 부여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40절을 보면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2-4절에 기록된 열두 명의 제자들만이 사도로서의 독특한 권위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사도’라는 그 말의 의미를 충실하게 생각한다면, 지금도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사도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도 모든 제자들에게 전해지기 전에 먼저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고려해야 가장 이해가 잘 됩니다.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전도의 범위를 한정해주셨습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만약 이 말씀을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전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열 한 제자들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고 하신 말씀과 조화롭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일차적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파송되는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면 아무 문제없이 잘 설명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시려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다만 이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열두 사도가 우선적으로 맡아야 할 부분은 이스라엘 전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어 그들도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지 않고 모든 족속으로 흩어져야 하겠기에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는 특별히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이 세운 터전 위에 오늘날까지 교회는 세계 선교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다양한 사역을 통해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5-6절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은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 그같이 명하셨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오늘날도 효과적으로 전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내고 전도 방법과 전도 대상을 연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도의 효과적인 방법을 말씀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사도들이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을 한정해 주신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보다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적용함에 있어서, 각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전체 그림을 잘 완성하는 길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외국에 파송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파송된 선교사들을 지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잘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가르침에 잘 협력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들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영역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세계 모든 족속을 품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각자가 부르심 받은 영역에서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게 되는 진정으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8a절은 사도들이 사역해야 할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그들의 임무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잘 본받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탁월할 것이 없는 평범한 그들이 어떻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1절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권능”을 부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로 행하게 하신 그 일들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 하면 발생할 것으로 구약에 예언된 일들이었습니다(11:5; 사 29:18, 35:5). 예수님은 사도들의 권능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었고, 그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들의 권능 행함은 고린도 교회에서 많이 나타났던 병 고침의 은사와는 달랐습니다(고전 12:9, 28). 사도들의 권능 행함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계시가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강하게 임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려내고 귀신을 좇아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사도들도 이후 변화산 아래에서는 간질병 들린 아이를 치료하지 못했습니다(마 17:15-16). 사도들도 자신들이 고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조차 한번 받은 권능을 비축해두었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능의 나타남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대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는 곳에는 어떤 모양으로든 기적과 권능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8b-15절은 전도인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전도인은 ‘오직 은혜’로 사역해야 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b)는 말씀은 마구 주어라는 말이 아니라 공짜로 주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권능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권능을 행한 대가로 무엇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 받는 사람이 대가를 지불한다면 그것으로 계산 끝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가 ‘값싼 은혜’로 변질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잘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10b절에서 “일꾼이 저 먹는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하셨습니다. 수고비를 요구하는 것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전도자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감사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9-10a절을 보면, 전도인의 두 번째 자세는 ‘오직 믿음’으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전도는 근본적으로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먹고살 형편이 풍족한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문제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체포되시기 직전에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눅 22:36)라고 하셨습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이지 전대를 가졌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요즘은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고 해도 예배당은 있어야 합니다. 적든 많든 ‘전대’ 곧 돈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전도는 재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11-13절까지는 전도인이 가져야 할 세 번째 자세는 적극적으로 ‘협력자를 찾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 신뢰가 사람의 도움은 모두 거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한 지역의 전도에 있어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자들을 영접하는 “합당한 자를 찾아 내”고 그 가정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를 개척할 때 사도 바울은 자주장사 루디아를 찾아내었고 그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자라난 바울이 개척 조상으로 여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마음과 기질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의 도움을 받고 협력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14-15절은 전도인이 가져야 할 네 번째 자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전도자는 ‘제발 한 번만 믿어주기를 구걸하는’ 자가 아닙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지만,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욕구와 필요를 적절히 채워주려는 자세는 꼭 필요하지만, 무슨 방법으로든 전도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전도를 위해서라 해도 복음의 영광이 손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합당한 자를 적극적으로 찾는 전도인의 삶이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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