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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 (눅 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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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한 가지 일을 전하는 10-17절과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두 비유의 말씀이 들어 있는 18-21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 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부르시고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는 그 여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곧 몸을 펴게 되었고,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것을 본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했다고 분노하며 무리에게 말하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으면 될 것을 안식일에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회당에 있던 무리에게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 들으라고 한 말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들으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가축들이 단 하루라도 물을 못 마시는 것은 견디지 못하면서 가축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인 아브라함의 자손의 고통은 얼마든지 오래 무관심 가운데 지낼 수 있는 자들의 외식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짐승들은 매일같이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게 하면서 십팔 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여인을 하루라도 빨리 그 귀신의 억압에서 풀려나게 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있는 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반대하던 자들이 모두 부끄러워했으며 온 무리는 그가 행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로 인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있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우선 예수님께서는 십팔 년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한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작은 자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귀신과 병에 대해서 주권자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안식일에 행하심으로써 안식일의 주인도 당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는 쉬는 날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 하루라도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구원의 사역을 멈추신다면 우리는 곧바로 감당할 수 없는 환난과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주일 중 하루는 쉬라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아오고 예배드리는 일도 하지 말고 아예 아무 것도 안 하며 집안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고 쉬라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하루를 온전히 바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 외식 즉 위선은 예수님께서 가장 강하게 자주 비판하신 죄입니다.  그들의 위선이 무엇이었습니까?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계명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계명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사람을 사랑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또 사람을 사랑할 줄 몰랐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형식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기계적으로 밖에는 이해하고 적용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와 판단과 행동에 사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비난하고 정죄하고 반대하는 일밖에는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분노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반대하라고 무리를 선동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무지와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본문 17절이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8절 이하의 두 비유말씀은 얼핏 보면 앞에 있었던 일과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그 두 비유말씀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그 이후의 내용이 앞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뒤에서 말씀하신 두 비유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셨고, 또 20절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시며 [겨자나무 비유]와 [누룩 비유]를 각각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본문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관시키는 열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이 하나님나라의 비유들이라면,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무도 고치지 못하던 병자를 고치시며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신 일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임했고 하나님나라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과 병에 대해서 뿐 아니라 안식일에 대해서도 주권자이심을 선언하셨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사역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음을 선언하신 것은 곧 또한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선포하신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시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의 계명의 진정한 뜻과 참된 사랑을 가르치심으로써 사람들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일은 곧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일을 행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나라의 사역의 진척과 위대함을 두 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먼저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첫째로 씨와 나무의 엄청난 차이에 있습니다.  겨자나무 자체는 특별히 큰 나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크게는 3미터 정도까지도 자랄 수 있는 나무지만 작게는 1미터 25센티 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라 할지라도 겨자씨의 크기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겨자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은 처음은 작으나 나중은 크게 되는 변화입니다.  비록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나라 사역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힘과 예수님을 대적하고 박해하는 유대교 지도층의 권력 앞에서 힘없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나라의 능력과 그 실현은 갈수록 더 크게 드러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시려 하신 것입니다.

  [겨자나무 비유]의 두 번째 요점은 나무는 가지와 잎사귀의 그늘을 가지고 새들에게 피난처와 안식처를 제공하며 보호와 안정과 기쁨을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무가 갖는 이 기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 아마도 겔17:22-23의 말씀일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예수님께서는 일찌기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 겨자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하나님나라 사역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피난처와 안식처를 제공하며 보호와 안정과 기쁨을 주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겨자나무 비유]의 세 번째 요점은 화려하지 않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그런 귀하고 중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굳이 백향목이나 종려나무에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겨자나무는 크기도 특별히 크지 않지만 그 겉모양도 그렇게 수려하고 우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듯이 하나님나라는 그 겉모양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며 열매가 많이 달려서 많은 새들이 날아와 앉을 수 있고 시원하게 쉴 수 있으며 필요한 양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실속 없이 겉모양만 화려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따르며 겸손하게 그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의 권력을 쥐고 있거나 율법과 유대교의 전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비유하시기를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누룩 비유]의 요점은 반죽 속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퍼지며 변화시키는 힘에 있습니다.  누룩은 한 번 반죽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지만 누룩이 들어간 반죽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은 다시 꺼내서 없앨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진리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모든 일들은 더 이상 이 세상으로부터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과 행하신 사역은 계속해서 이 세상에 퍼지며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힘이나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주의 몸 된 교회와 그 지체인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 세상에서의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는 늘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 것이기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완전한 등식이 성립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지체인 우리가 모두 다 불완전한 신앙의 소유자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불완전한 등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완성되고 영원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며 그 실현을 위해서 힘써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 어떠할지를 미리 깨닫고 맛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거울이고 표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나라에 관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곧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라 할 수 있는 교회는 약하고 무능한 것 같으나 누룩처럼 이 사회 속에 퍼져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교회이기만 하면 그 확산과 변화의 힘은 무섭고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나 그 나중은 심히 클 것이며, 그 퍼지고 변화시키는 역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이나 세력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하나님나라 사역은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야 하고 그래야만 교회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친히 역사하실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에 대한 신뢰를 지키며 그 안에서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현재 교회에 반대하고 교회를 억누르며 일시적으로 교회에 대해 우세한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권력도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겨자나무 비유]와 [누룩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주님의 사역과 그로 인한 영광은 가면 갈수록 더 클 것임을 확신시켜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며 [겨자나무의 비유]대로 겸손한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넉넉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의 보금자리가 되고 [누룩의 비유]대로 이 세상 속에 들어가 퍼지며 변화의 힘을 발휘할 때에 교회를 공격하며 파괴하려는 그 어떤 악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전진을 막을 힘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를 적대시하며 교회를 억압하는 악한 세력들의 일시적인 득세와 창궐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무너지고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굳게 믿으며 오직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 되게 하는 일에 우리는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일하시며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권능이 넘쳐흐르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그 안에서 모두가 기뻐하는 교회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겉만 화려한 교회가 아니라 내실 있는 교회 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과 함께 경건의 능력이 있는 교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그러한 교회 되도록 함께 기도의 힘을 모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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