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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디어 로마 ! (행 28: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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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고 살다 갑니다만
어떤 사람은 온갖 역경과 싸우며 고난의 삶을 살지만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고
한 시대의 역사를 변화를 시키는 생애를 살기도 합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입성하는 바울이지만
바울의 생애는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 입성이 우리에게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와 신앙적 교훈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드디어, 마침내, 기필코, 기어이, 로마에 들어왔습니다.
이 순간은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고 있었고,
로마 복음화는 곧 세계 복음화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는
천군천사들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환영 퍼레이드를 펼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신문 톱뉴스는
[ 드디어 바울 일행 로마에 입성하다 ] 가 실렸을 것입니다.

그럼 먼저 바울의 로마 입성 경로를 살펴보면
1. 바울의 로마 입성 경로와 로마 교회 성도들의 바울을 맞는 자세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11-15절)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을 지낸 후 애굽에서 곡물을 싣고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 배에는 <디오스구라>라는 깃발이 달려 있습니다.
<디오스구라> 는 당시 뱃사람들이 섬기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동생,
카스트(custer) 와 폴럭스(pollux) 의 형상을 조각한 깃발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수라구사에 도착하여 사흘간 정박을 합니다.
수라구사는 유명한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으로
지금의 시실리 섬의 수라구사입니다.
수라구사에서 이탈리아 최남단의 레기온 항구에 도착을 하여 하루를 지나고
남풍이 불어 레기온에서 보디올에 도착합니다.
보디올은 지금 나폴리 만의 외항 포주올리(pozzuoli)입니다.
여기서 믿는 형제들을 만나 일주일을 유하다가
드디어 220km 떨어진 로마로 입성하게 됩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압비오 저자 와 삼관까지 나아와 마중을 합니다.
압비오 저자는 압비오 광장을 말하고 삼관은 세 여관을 말합니다.
압비오 도로는 로마로 통하는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벌써 바울이 로마로 입성하기 전에
보디올과 로마에 믿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가들에 의하면 B.C 4년에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었고
A.D79년에 일어난 베스비우스 화산 폭팔로 폼베이 도시가 묻혀 버렸는데
1755년에 발굴될 당시 비문에
[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불 속에서도 기뻐하십시오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비오 도로는 개선 장군이 로마로 입성하는 도로지만
바울은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로 가지 아니하고 죄수의 몸으로 갔습니다.
그것도 멜리데에서 섣달을 머물다가 수라구사에서 3일, 레기온에서 하루,
보디올에서 7일간 머물다가 끌려가는 바울의 발걸음
얼마나 피곤하고 처량하게 보였겠습니까마는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탄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속에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불타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몰라주었지마는
그래도 로마에서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까지 마중 나온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
우리의 선교사님들 오시거든 제발 좀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또 한 선교사가 왔다 가는구나 하고 무관심 하지 마시고
내 혈육 선교사로 파송한 것 같이 좀 관심 같고 따듯하게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하고자 하는 담대한 힘을 얻습니다.
( 저는 꼭 선교사를 위한 물품을 모아 놓습니다 )

이제 바울 일행이 로마에 입성합니다.
2.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여 먼저 누구와 만났으며 이러한 바울의 행동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까?(16-22절)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감옥에 가두어 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이제는 누구에게도 자유로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축복과 삶의 보람이란?
궁궐에 있느냐? 감옥에 있느냐? 가 아닙니다.
출세했느냐? 못했느냐? 가 아닙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고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에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 할 수 있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삶의 보람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고요? 여기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이란 분이 있었는데
마르티는 젊은 시절 집권세력에게 밀려나
생활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고생을 하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밤새 구두를 도둑맞아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마르티는 너무도 화가나 여관주인을 불러내서 한껏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 아니 도대체 누가 내 구두를 가져갔단 말이오. 주인이 책임을 지시오 ]
주인은 그렇게 화를 내는 마르티를 바라보더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구두 한 켤레를 내어주고는
교회에 함께 가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마르티는 교회에 마지못해 갔다가
휠체어를 탄 장애자가 감격해 하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그의 삶 자체가 변화되었습니다.
[ 저기 저 사랑은 두 발이 모두 없어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는데 어떻게 저리도 평안하고 순전한 모습일 수 있을까?
나는 두 다리가 아닌 신발을 잃고도 남에게 화를 내고 원망하지 않는가? ]
마르티가 재무장관이 된 후 자신의 간증 속에서
[ 내가 이렇게 된 배후에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그 감사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 라고 합니다.
내가 어디에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감사가 결국은 행복한 삶을 안겨다 줄 줄 믿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여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17절에 사을 후에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처럼 시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고위층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변명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이여!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바 되어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결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된 것은 20절에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 ] 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며 밤낮으로 기다리던 메시야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다윗과 및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모든 인생 문제가 해결될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구원의 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믿겨지지 않아
예수님을 핍박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간절한 소망인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인생들은 이 땅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열심히 살아도
죽음으로 끝날 허무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하루를 살아도 주와 복음을 위한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만유가 회복된 나라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가운데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소망을 발견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롬8:17-18절에서 고백했습니다.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소망보다도
현실적인 소망들이 피부로 와 닿고 이에 목을 매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 소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과 하늘나라의 영광이 우리의 참 소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롬8:24절에
[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장차 얻게 될
하나님 앞에서 그날에 주실 영원한 존귀와 영광과 상급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기도 하고
아무 대가 없이 희생하기도 하고 사명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놀랍게 성공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순간의 영광은 얻었지만 영원한 영광은 얻지 못하는
허무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참 소망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
예수님을 인하여 쇠사슬에까지 매였노라 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사명의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쇠사슬에 매인 것이 수치스럽고 벗어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장식품으로 걸고 다니는 금사슬보다
발목에 채인 쇠사슬이 훨씬 값져 보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율법에 매여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쇠사슬에 매임으로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값진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사슬에 매인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매이게 된 것은 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아니면 이렇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매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바울이 자신은 이스라엘 소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변명을 하니
유대인 지도자들이 하는 말이
[ 우리는 유대에서 당신께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누가 와서 좋지 못한 것을 고한일도 없으니
우리가 당신이 전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듣고자 하노니
단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은 아노라 ] 고 합니다.

그래서 일자를 정하고 바울을 다시 만나기로 하고
23절에 바울이 거하는 집에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온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로마에서 유대인 높은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고자 했던 핵심이 무엇입니까?
3.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23절)
여기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23절에
1)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한 첫 메시지가
[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요
욕심과 죄와 사망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고
하늘로 호흡하는 자가 되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할 때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했던 예수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란 말은 성경이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에 관한 일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를 가르치고 교파를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교회도 교파도 교리도 아니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예수님께 더 관심을 가지시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일을 가르치니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하면
4.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이런 반응을 두고 바울을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24-28절)
24절에
[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
이것이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막16:15-16절에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이것이 영적인 현실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하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어 살아가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해 바울은 25절에
[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 라고 하며
사6:9-10절 말씀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완악함을 책망을 합니다.
[ 듣긴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도다 ]
왜? 이 백성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는 둔하게 되고 눈은 감기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의지해 권면합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듣기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을 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삶에 반드시 변화와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 10년 20년 믿어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오늘 이 말씀이 나보고 하는 말씀인 줄 알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역사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다시금 이방인 선교의 방향을 붙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2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로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이 무엇입니까? 행1:8절입니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사도행전의 요지는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 분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 비전과 이 메시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적인 메시지가 들리지 않고
선교적인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사야가 말하는 난청 교인이요 눈먼 교인이라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울이 인용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로 말한다면
아직 마음이 완악하여 내가 깨어지지 못해서
우리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이 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펴온 글입니다.
미국에서 어린 소녀가 선교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가서 간호학을 공부해서 간호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속에 중국에 선교사로 가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로 갈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선교부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반드시 거쳐야 되는데
신체검사 결과 그 여학생은 심장병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준비해 왔는데 마음속에 깊은 실망이 있었습니다.
[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로스앤젤레스 근방에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런 후, 한번은 선교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부름을 받았다는
젊은 자매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된 분이었습니다.
역시 중국에 갈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지 부족한 자금의 후원만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 우리가 서로 동역자가 됩시다.
나는 이곳에서 직장을 가지고 머물러 있겠습니다.
내가 받는 월급의 절반을 당신을 위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중국을 위해 가십시오. ]
그 자매는 상당히 좋은 수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선교사들을 돕고 직장을 다니다가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상당히 큰 회사의 CEO가 되어
다섯 사람의 선교사 생활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 어떻게 그렇게 다섯 명의 선교사를 지원할 수 있느냐? ] 하니
[ 내가 가야할 곳을 대신 갔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하나님이 다섯 몫을 감당하라고 하네요 ]
선교는 반드시 가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아닙니다.
보내는 사람도 선교사입니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각오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세계복음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의 바울의 전도가 어떻게 출발하고 있습니까?
5. 세계 복음화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면서 어떻게 출발하고 있습니까?(30-31절)
30,31절을 보세요.
[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바울이 셋집에 가택연금 된 상태에 있었지마는
감옥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로마 정복의 큰 비젼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작은 행동에서 이 비젼을 이루어 갔습니다.
로마 선교의 위대한 환상은 셋집에서의
찾아오는 몇몇 사람을 붙들고 성경공부로 현실화 되었습니다.
셋집 감옥에서 몇몇 사람에게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그가 가진 환상에 비해 너무도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서 복의 근원 삼으시고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셋집 감옥 일대일 성경공부는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한 알의 밀이, 겨자씨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30년 전에 이층 열아홉 평 셋집에서 교인 한 명 없이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내일교회에 엄청난 복을 쏟아 부어 주었지요.
30년이 지난 지금 청년 같은 교회가 되었고
추수할 때가 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세계사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도행전 공부는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마지막이 어떠합니까?
31절을 다시 마지막으로 읽어보겠습니다.
[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쇠사슬도, 감옥도, 로마 군인도 바울의 복음전파를 막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쇠사슬에 매였으나 복음은 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 후임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2:9절 [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
사도행전이 다른 성경과 다른 것은 끝마무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은 끝마무리가 인사로 축복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잘나가다가 갑자기 끝이 납니다.
마치 영화가 중간에 뚝 잘리듯이, 갑자기 끝이 납니다.
마치 집을 짓는데 마무리가 안 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장을 넘겨봐도 뭔가 이상하리만큼 뒷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는 장면이 기록된다든지 아니면
결국 바울로 인해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축복의 인사를 해서 맺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행전은 갑자기 끝을 맺은 것일까요?
이것은 복음증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대한 기록은 교회에 맡겨졌으며,
이러한 복음전파는 현재 우리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계속하여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사도행전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기에 마무리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하여 행29장의 사건들이 기록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갑자기 중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9장은 우리 손에 의해 지금 쓰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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