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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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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세계 곳곳에는 테러와 분쟁과 전쟁 등으로 평화롭지 못한 상태가 널려 있는 상황입니다. 보프(Boff)라는 신학자는 그의 저서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에서 3,400년간의 기록된 인류의 역사 중에 3,166년간은 전쟁을 하였고, 나머지 234년은 전쟁을 준비하는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끝없는 테러와 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는 우월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이 우월감이 남을 지배하려 들고 정복하려들고 무시하기 때문에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자신의 열등감은 패배주의로 흐르기도 하지만 더 약한 자를 향한 폭력과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월한 자들에게 대한 이유없는 미움에서 오는 갈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현대인들 중에는 화평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샬롬과 안녕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월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우월감을 가진 사람으로써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또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써 폭력적입니다. 

  이런 때에 오늘 주시는 7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이란 말씀을 우리가 서로 나누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먼저 "화평케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한 개념정의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케 한다는 것은 단순히 평안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 화목의 예찬론자만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화평에 속하는 자를 말하거나, 화평한 쪽에 서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화평을 갈구하고 희구하는 정도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 화해를 실천하는 사람, 화평을 일구어내는 자를 가리킵니다.

  본문에 사용되고 있는 '에이레노포이오스'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와 '행하다, 만들다'을 뜻하는 포이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역본은 이러한 의미로 'peace maker'라고 번역 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평화로운 사람들"이나 "화목한 사람들"과 같은 인간의 성품이나 상태를 말하지 있지 않습니다. 그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화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란 정도의 약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화평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애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평을 일구는 사람, 화평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을 알고 있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기도를 알고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찬송을 알고 있지만 찬송하지 않는 사람이 찬송의 사람의 아닌 것처럼, 성경을 알고 있지만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이 말씀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화평을 알고 있으면서도 화평케 하는 일에 힘쓰지 않는 사람도 화평케 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알고 있는 신앙에서 실천하는 신앙으로 옮겨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후 5:18에서 보는 바대로 주께로부터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찬송가에도 보면 우리가 맡은 이 직분은 "천사도 흠모하는 직분"이라고  찬송합니다.

  이 세상에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Peace Maker)도 있고 불화케 하는 사람(Trouble Maker)도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나 평화를 만듭니다. 그가 가정에 가면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그가 교회에 가면 교회가 평화롭습니다. 그가 직장에 가면 직장이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불화케 하는 사람은 "불붙은 집에 키질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분쟁이 생기면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지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그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겠습니까? 화평케 하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불화케 하는 것은 악한 영이 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 중 네 마리의 황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들에서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네 마리의 황소들은 풀을 뜯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늘 함께 했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사자 한 마리가 황소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입니다. 이 사자는 네 마리의 황소를 한꺼번에 상대하기가 너무나 힘에 겨웠습니다. 어느 날 사자는 약간 뒤쳐져 풀을 뜯는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
  사자는 다른 소들에게도 차례로 거짓말을 합니다. 그때부터 네 마리의 황소들은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합니다. 미워합니다. 시기합니다.  결국 황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사자는 황소들을 차례로 공격해 네 번의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저와 여러분의 삶,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갖가지 '불신의 씨앗'을 던집니다. 의심을 가져다 줍니다. 불평을 가져다 줍니다.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좋은 점, 장점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단점과 약점만을 보게 하고,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이간질시킵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멀어지게 합니다. 사단의 전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삶, 믿음생활을 무너뜨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궤략에 말려들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평화를 깨뜨리려는 세력도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내면 속에 있는 미움과 시기로부터 각가지의 질병, 가난, 사회적인 불의와 사고들, 이념적인 갈등, 인종갈등, 국가간의 전쟁, 그리고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의 세력들이 평화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악한 세력과 맞서 싸워서 평화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화평을 지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단의 역사와는 달리 우리 성령님의 특징은 사랑하게 합니다. 좋은 것만 보게 합니다. 칭찬하게 합니다. 격려합니다. 평화하게 합니다. 평안하게 합니다. 화평하게 합니다. 화목하게 합니다. 평강과 강건을 가져다 줍니다. 이해해주고 용서합니다. 손잡아 줍니다. 서로를 세워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때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이든지 "아무 일에든지 간에 다툼으로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하라"(빌 2:3-4)고 하셨습니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살도록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롬 12:18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불화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불화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욥22:21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5:1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세상에서 불화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기름부어주셔서 화평케 해 주시기를 간구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어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케 하려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화평은 이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찰과 충돌을 제거하는 사람, 분쟁을 말리고 그치게 하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내 자신이 다른 사람과의 마찰을 피해야 되지만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의 요소인 충돌을 제거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옛 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싸움을 말리고 원수의 높은 담을 헐어 버리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힘이 되는 말, 좋은 말, 위로가 되는 말, 칭찬하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화평은 가만히 앉아서 바라거나 선이나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언제나 중재자가 필요하며 희생자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만드는 것은 힘과 인내와 수고가 동반됩니다. 하다못해 밥을 짓는 일도 불이라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인내와 수고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창작하여 만드는 것은 힘과 인내가 필요하고 겸손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합니다. 화평케 만드는 일도 힘이 수반되어야 하고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힘이 듭니다. 희생이 따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냥 안일무사가 화평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떻든 말썽만 피하면 된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이나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다툼이 없는 것이 화평이 아닌 것입니다.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겉으로 들어내놓지 않으면 그것을 화평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평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십자가를 지신 일입니다. 

  화평은 사랑으로 오는 것입니다. "자신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차피 화평케 하는 사람도 있고 불화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으며 그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된 증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닮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격을 닮은 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품격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약3:17에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거룩하고 화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로부터 오는 화평함을 입어서 화평을 이루고 화평을 만들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나녀된 우리들은 평화를 이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히 12:14을 통해서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3:18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법칙이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우리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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