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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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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대상4장 9절-10절



새해를 맞아 한 해 동안 우리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내용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기도는 이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으로 세간에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브르스 윌킨스가 쓴 조그만 책자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에서는 출간 12개월만에 500만 부가 팔린 책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첫 출판 이래로 지금까지 4년 동안 240여판을 찍어낼 정도니까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고자하는 야베스는 오래 전 이스라엘 족장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오늘 우리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배워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의 기도처럼 수준 높은 영적인 기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기도는 다분히 인간적이요,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가지고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읽으면서 무언가 마음에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참, 인간적인 기도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10절) 얼마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기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10절)고 나옵니다. 따라서 야베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소박하고 인간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후 기도 응답을 받아 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9절에 보면, 그의 어머니가 야베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아이를 낳았는지를 아이가 평생 잊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야베스'라는 말은 '고생,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Mr. Pain'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지금부터 50년 전 만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 많았잖아요? 따라서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왜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내가 수고로이 고생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까요? 혹시 거꾸로 나왔는지, 아이를 낳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집안에 감당할 수 없는 우환이 닥쳤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고통을 자식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유대나라에서 아이 이름까지 그렇게 짓는 것은 무리수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에서는 이름이 팔자를 정하고 팔자 때문에 운명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기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룻기서를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이민 갔다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말론', 또 다른 아이는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허약하다'는 뜻을 지닌 말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척하다'는 뜻을 지난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두 아들 다 '허약하다', '수척하다'라고 지어놓았으니 그들이 잘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나중에 결혼을 했는데, 큰아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자식 없이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결혼 후 얼마 안돼서 자식 하나 남기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평화'라는 이름의 의미 그대로 한평생 전쟁 한번 치루지 않고 팔자 좋은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이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따라서 아들을 낳아서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Mr. Pain'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의 의미인 '고통'을 자꾸 느끼게 만드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야베스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 이름이 항상 자기 뇌리 속에서 불길한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될 팔자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름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가 인생을 끝낼지 모르겠다.' 하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계속 그를 사로잡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의 눈앞에 있는 환경은 그리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을 보면 넘어야 될 산들이 첩첩산중이고 자기 이름은 불길하게 고통이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성경에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라고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한번 부르짖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좀 매달려야 되겠다.'고 절박하게 느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앞에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하나님, 제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내 지경을 넓혀주세요." 자기의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러다가는 망할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상은 나에게 복을 안겨주지 못했지만, 내가 나의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물려주시고 내 인생의 지경을 넓혀 주신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야베스는 첫째, 복에 복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환경이 다 제각각입니다.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선택하지 않았고, 환경도 외모도 체질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고 보니까 부모님은 부자였고, 마침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고 거기다 부모님이 잘 생겨서 미남 미녀가 되어 미인대회에 나가 뽑히기도 합니다. 가정환경이 좋아서 복된 인생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로 주어진 좋은 조건 때문에 불행과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 박대통령의 아들 지만 군을 보고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라 했지만, 오히려 대통령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마음에 심한 좌절과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들을 겪고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의 조건들이 행복의 진정한 조건이 되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에 복을 더하사' 이 말은 단순히 세상의 있는, 세상이 소망하는 그런 복을 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 주어지는 복을 내 인생에 가득 채워 달라는 기도입니다. 지금 야베스가 달라고 하는 복은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말합니다. 복의 근원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는 복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의 복을 얻었던 것처럼, 주여 저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사람이 복 받는 역사가 있게 해 주소서"라는 비젼을 야베스는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야베스의 삶은 이름 그대로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야베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그대로 고통과 슬픔을 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그가 섬기는 보디발 장군의 집에 큰복이 임합니다. 감옥에 가면 전옥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끼칩니다. 그가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자 온 나라와 백성들에게 7년 간의 대 기근을 이기게 하는 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야베스의 기도는 아브라함과 요셉과 같이 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단지 복을 무진장으로 받는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베스는 자기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경의 의미를 ‘해변 혹은 경계’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베스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그 약속의 땅을 분배해주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이런 간구는 자신이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땅을 더 넓혀 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땅을 더 넓혀달라는 의미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향력'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향력이 미쳐지는 곳이 더 많아지게 해달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리더는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21세기는 사회에 영적 영향을 주는 크리스챤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제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습니다. 10년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했던 이회장이 "천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는 새로운 경영방향을 설정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삼성전자의 경우 연구인력이 93년 1만3000명에서 작년에 2만2000명으로 늘고, 특히 박사급 인력을 같은 기간 500명에서 4배나 넘는 2100명으로 확대를 했습니다. 그는 어느 석상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만 명이 한 명을 먹여 살리고, 만 명의 백성이 한 명의 왕, 만 명의 종업원이 한 명의 사장을 먹여 살리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제는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리는 그런 시대에 왔습니다.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려요. 반도체를 개발하는 천재 한 명이 삼성전자를 먹여 살리고, 대부분을 수출하니까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지 않습니까?" 저는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세상의 영향력도 때로는 국가를 변화 시키고,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건강을 조금 만 더 주십시오' '지금보다 조금만 더 풍부함을 주십시오'와 같은 수준의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이 사용되어지는 영향력이 나타나게 도와 달라는 소망의 기도'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삶의 전부가 하나님을 위하여 쓰임 받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더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해 달라는 귀한 기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삶 전부를 드리게 되는 것이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이요 야베스의 삶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향력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영향력 있는 풍부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주님 이제 저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간구 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비전을 나누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이 더 확장될 수 있는 일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 그래서 내 인생과 더불어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함이 나누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 넓게 증거 될 수 있도록 영역의 확대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간구하 는 복과 자기의 지경이 넓혀지는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복을 만들어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노력으로 지경을,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무력과 술수 그리고 노력 등으로 이루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복의 허무함과 스스로 만든 영향력이 가지는 한계를 보았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더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야베스에게서 쉽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야베스가 고백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단강 속에 있던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탑을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이는 홍해와 요단강을 여호와의 손이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야베스는 주의 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인간 스스로 했을 때의 실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에 불을 쪼이며 어린 계집종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 앞에 철저히 자기를 위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를 붙들지 아니하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나이다.’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야베스는 자기의 영역의 확대를 위하여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기는 어렵다는 것에서 인생의 고갈과 어려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는 여기를 떠나지 말고 여기에 머물라 그리고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즉, 능력 없이 떠나 사역할 제자들의 실패와 고갈 넘어짐과 무너짐을 아셨기에 먼저 하나님의 손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위해 간구 하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야베스처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배우자를 위해. 사업을 위해. 나의 지혜와 노력과 경험이 아닌 주의 손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시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환난이라는 말을 사전으로 찾아보면 평소에 알고 있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환난'하면 날마다 신앙 때문에 쫓겨다니면서 핍박 당하는 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원래의 뜻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만나서 근심과 불안에 싸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고통하고 고민하고 근심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당하는 환란은 형형색색 가지가지 입니다. 영적인 공격을 받아서 아파하시는 분, 마음이 찢어질듯 아파서 괴로워하며 달려나오신 분, 육체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시는 분,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는 가정적인 어려움, 깨어져 가는 관계... 그러나 그것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위로, 그것을 쓰다듬는 하나님의 사랑은 환란보다도 많고 고난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크고 작은 환란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 환란과 고난이 어렵고 아프고 무겁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나를 위로하시고, 내가 당하는 그 고난을 바라보고 계시다면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십시요!

기상천외의 사건 타이타닉이 두 동강이 났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물 속에 빠져 죽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가죽부대 하나를 끌어안고 몇 날 몇 일 바다 위를 떠 파도에 휩쓸려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손과 발, 온 몸에 힘이 다 빠질 대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가죽 부대를 놓고 포기해 버리자 라고 생각했을 때, 1인승 소형 비행기 한 대가 어디서 날아오더니 머리 위에서 맴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나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서로들 손을 흔들었습니다. 가죽 부대를 놓으려는 손에 갑자기 힘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 어디서 그토록 힘이 무섭게 솟아났는지 날고기를 잡을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몇날 몇일 버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갔다.' 몇일을 견디는 동안 구조대가 달려와서 이 사람을 건져 주었습니다. 나 혼자 고독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외롭게 고통 가운데 버려진 존재가 아니고 세상에 환란 가운데 집어 던져진 존재가 아니고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 위로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다. 권능의 아버지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는 메시지입니까?

구약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풀무불 속에 집어 던져집니다. 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 던져지도록 내버려두었는지 그리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젊은이들을 왜 건져주지 않았는지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풀무불 속에 세 사람이 던져졌는데 풀무불 속에 네 사람이 빙글 빙글 불 속을 거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같은 시험을 만나서 우리가 던져질 때에 물같이 어려운 고난의 행진을 우리가 계속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왜 고난의 역사 가운데 집어 던져 넣으시는지 왜 나를 고난에서 나를 면죄시켜 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길이 없으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불같은 시험 가운데 전능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혼자 환란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능력 있는 아버지가 여러분의 환란의 현장에 함께 우뚝 서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야베스는 지금의 현실 앞에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10절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믿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야 할 이 한해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기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 질 것입니다. 오늘 '야베스'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가지고 우리의 삶 속에 지경을 넓히는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기도의 자리에 내 삶을 내려놓고 주의 손이 함께 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22-25일 까지 '축복의 통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부흥 성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한 주간 새벽에 특새를 가지려고 합니다. 기도의 사람들이여 일어납시다! 영적인 사람은 기도 속에서 더 많은 소리, 없는 큰 말을 듣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기도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 안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써, 힘으로 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풀었습니다. 기억할 것은 응답 받는 기도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걸어가면서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한다는 그런 한가한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식으로 기도하다가 응답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 뜻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편안한 환경과 안일한 생활로 길들여진 육체를 쳐서 기도의 자리로 내몹시다! 새벽을 깨우며 기도의 자리를 향해 어둠을 가르고 나아갑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사람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들을 쏟아 놉시다. 눈물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 줄을 끊고 능력의 기도 줄을 잡읍시다. 굵은 동아밧줄과 같은 기도 줄을 매달아 놓고 끊임없이 매달려 기도하는 겸손한 능력자들이 됩시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많이 꿇는 사람은 사람과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 수 있는 사람은 인간 앞에 약자와 패자가 흘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한해도 여러분의 지경이 넓혀지는 축복의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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