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금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 잡초 잡초
  • 365
  • 0

첨부 1


1. 들어가는 말

종종 거리를 지나다 보면 짓다가 만 미완성된 건물이 멈춘채 서있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그냥 미완성된채로 남아있으면 얼마나 눈에 거슬리고 흉한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서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사를 하다가 돈이 없어서 부도가 나서 더 이상 공사를 못해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허가를 내지 않고 불법으로 공사를 하다가 관청으로부터 정지를 받아서 중단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성이 되지 못하고 짓다가 만 집이나 건물을 보면 얼마나 보기 싫은지 얼마나 보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 미완성된 집과 같이 지금 공사중에 있습니다. 지금 공사를 해서 점점 온전한 건물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공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정지된 건물처럼 방치되어 있다면 보기에 얼마나 흉한지 모릅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분들을보면 어떤 분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았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살면 좋을지 모르지만 과거만으로 현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오늘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입니다.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을 살 때 어제가 있고 오늘을 살 때 내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고 있습니다.이것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과거에 구원받았지만 지금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현재의 삶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죄에서 건짐을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그런데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오늘 현재에 그 구원을 이루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루라”는 말은 “계속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받았다는 은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구원받은 것을 현재의삶에서 나타내면서 살라고 합니다. 오늘의 삶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현재의 생활 속에서 구원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만을 기억하고 감상에 빠져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미래만을 기다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떻게 해주시겠지 막연히 기다리는 종교가 아닙니다.지금 이땅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명령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제 구원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현재의 생활 속에서 구원을 나타내라”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화의 과정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나타내라”는 것은 ‘계속하여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룩해지는 것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참고 견디면서 계속하여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과거,현재,미래의 3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칭의,성화,영화라고 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수믿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 영혼이 죄사함받고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는 칭의가 있습니다.미래에 우리는 한번 죽게 되는데 그때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그때가 바로 구원을 완성하는 단계인 영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땅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영화의 그 시간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 성화의 문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어떻게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나에게 요구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바울이 있을때 뿐 아니라 없을때에도 항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복종의 책임이 있습니다.복종할 때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구원의 선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구원을 스스로 지키면서 책임을 지키어가야 합니다.

한번은 제가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햄스터라고 하는 작은 애완동물을 선물로 사준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햄스터를 키우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밥도 주어야 하고 배설물도 치워주어야 하고 목욕도 시켜주어야 합니다. 워낙 동작이 빨라서 잘못다루다가는 어디 숨어버리면 찾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약 보름정도 키우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그동물을 돌보는 책임을 감당하기에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부모된 우리는 선물로 사 주기는 했지만 그것을 잘 관리하고 돌보는 일은 아이가 잘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을 주셨고 특권도 주셨지만 그 구원을 지키고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 복종이 부담되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믿음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복종하는 일에는 부담을 느끼십니다.
‘아 나는 편하게 믿고 싶은데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내가 원할 때 무엇이든지 하도록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신앙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관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 마음대로 하라’“너의 자유대로 하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고 “복종하라” 명령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입니다. 무슨 일에나 어떤 말씀에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와 거룩한 두려움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령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에도 먼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순종하면서 예배드릴때 은헤가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 해야 봉사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사에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식할 때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 자녀들이 복종하실 때 기뻐하십니다. 복종하실 때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복종하실때에 놀라운 역사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워보시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키우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뜻이 있으니까 부모들이 말을 하면 그대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복종하지 않는 자녀들을 대할 때 강압적인 부모들은 꾸중도 하고 매도 되고 복종하도록 만들어갑니다. 좀 자율적인 부모들은 그러면 너뜻대로 해보라고 내버려두고 결국은 실패하고 하면서 깨닫고 돌아오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소원은 자녀들이 바른 뜻 앞에는 복종하여 주기를 바라고 복종하는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합니다.

왜 우리가 복종해야 합니까?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마음에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순종하는 사람 속에서 행하십니다.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이 순종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을 하시고 의지를 주십니다.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거역하면 결국 내 안에 성령이 소멸되게 됩니다. 성령님이 근심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기도하라고 하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선을 행하라고 하시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면 그것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삶에서 성령님께서 마음 속에서 강하게 감동을 주어서 아무개에게 전화를 하라고 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을 해보면 꼭 전화를 했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을 봅니다. 인간적으로는 좀 힘들고 어려워도 내뜻을 버리고 성령님이 원하는대로 순종하시는 삶이 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께 복종하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속에 육체의 정욕대로 육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5:20-21“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나를 쳐서 복종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일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의 복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잠16:32“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가장 힘든 적군,가장 어려운 싸움이 바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싸움입니다.
P.메신저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미국의 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를 위한 잔치에서 워싱턴의 어머니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한 불란서  관원이  워싱턴의  어머니를 향하여 몸을 돌리며 묻기를 "어떻게 하여 아들을 그렇게 귀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하였다. 워싱턴의 어머니는 곧 대답하기를  "나는 그에게  하나님께  복종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복종의 싸움이 이 지상에서 우리가 날마다 해야 할 싸움입니다. 죽기까지 이 복종의 싸움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리로라”고 합니다.바울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성도들을 향하여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 잇습니다. 진정한 성도들은 어떤 시련과 역경 앞에서도 자기를 쳐서 복종합니다. 시련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합니다.


2. 구원을 이루어 가는 모습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여 흠이 없고 순전해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4절-15절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그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순전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흠이 없는 온전한 모습입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그럴 때 빛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세상에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빛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빛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곳에 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 강조하는 죄악을 2가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원망입니다. 원망은 내적으로 불만의 상태가 외적으로 입술을 통하여 표출된 상태입니다.모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불평하는 자세입니다.시비란 마음에 못마땅하여 비판을 제기하고 논쟁하려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표적인 삶이 바로 원망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원망할 수 있습니다.

언제 가장 원망을 많이 할까요?
우리는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홍해 앞에 가자 원망합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쫓아오는 애굽군대가 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이렇게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라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신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을때 모세를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가마곁에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여기서 주려죽게 하는냐”하면서 원망합니다. 물이 없을때 원망하고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고 힘들다고 원망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할때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그 원망이 극에 달할때가 언제입니까? 민수기14장에 보면 그 원망과 시비가 극에 달합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 앞에 이르러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작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합니까?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욕심때문입니다.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조금만 고난이 오고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원망하는 그 순간 돌이켜 감사하는 사람,돌이켜 승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결국 다수의 사람들은 시비 속에 원망 속에 결국은 구원을 이루어가지 못했습니다. 원망하고 시비하자 하나님이 중간에서 탈락시킨 것입니다. 더 이상 시비하고 원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주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자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중간에 모두 불러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같이 광야교회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같이 하나님나라의 생활을 지금 여기서 해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정말 100% 완전한 환경은 우리 중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을 온전하게 삶의 습관을 새롭게 바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구원을 위해 날마다 순전함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음의 시비와 입술의 원망이 있습니까? 그것이 쉽게 습관으로 굳어져 나의 악습관이 되지는 않습니까?
원망의 악습관을 어떻게 고쳐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에 원망이 없도록 주님의 은혜로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마음에 숨은 상처가 치유되고 원망이 씻어집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입술에 원망의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다스려야 합니다.돌이겨 감사의 말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자꾸 시어머니 원망하지 마십시오.남편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즘 시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때로 불의한 일 불의한 사람들을 원망할때가 있었는데 그것조차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불의한 일과 그 사람을 하나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다윗을 보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2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복종하엿습니다. 결국 다윗을 갚아주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좀 어려움을 만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반드시 확신해야 할 것은 고전10:12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원망과 시비를 버리고 빛된 삶으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세워져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세는 마치 운동선수와 같아야 합니다.
운동선수의 자세를 생각해보십시오.
발은 지금 땅에 딛고 있지만 눈은 멀리 결승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을 계속하여 앞을 보고 발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경주를 합니다.
왜 운동 선수가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경주를 합니까?
왜 우리가 날마다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면서 일을 합니까?  거기에 걸맞는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원을 받고나서도 고생없이 땀없이 대충대충 쉽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하고 싶으면 하고 모든 것은 내 감정에 충실하게 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 육신을 따른 자유로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국 그런 믿음 생활을 하는 경우에 자랑이 없는 구원, 상이 없는 구원을 발을 것입니다.
여러분 상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는 분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에 대하여 욕심을 갖으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합니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상에 대한 욕망을 갖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스포츠가 세계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이탈리아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종합성적 7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겟지만 쇼트트랙경기에서 금메달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등 총 11개를 땃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금메달 1개밖에 따지 못한 것을 본다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쥬니어피겨스케팅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16세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땃습니다. 또 세계쥬니어스케이팅 대회에서도 우리나라의 김유림 선수가 종합 1위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미국의 LPGA 골프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선수들이 상금을 거의 싹쓸이하고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제1회 WBC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축구로 말을 하면 야구월드컵인 셈입니다. 우리나라는 8강전에서 3전전승으로 4강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이미 예선과 8강에서 이긴 일본과 대전을 해야 합니다. 이 대회가 열릴때 우리나라는 솔직히 8강정도에 들어가는 것만해도 괜찮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야구선진국인 일본과 미국같은 나라를 물리치면서 온 나라가 얼마나 기뻐하고 즐겁습니까?
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같은 국민으로서도 기쁜데 본인들은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만일 여러번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데 스포츠가 없고 이런 상제도가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여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는 많은 기쁨과 행복을 도둑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재능을 사장시켰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때에 우리에게 주신 재능 모든 은혜와 은사를 통해서 주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 상은 진정한 영광의 상인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자랑할 만한 주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