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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행 8: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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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밤 예배 때에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뜻하지 아니하게 벼슬 아닌 벼슬을 하나 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라고 하시면서, 이번에 한국성경공회의 대표회장을 맡게 되신 것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까지 50여년을 목회해 오시면서 교단 밖의 대외활동은 일절 삼가시던 원로목사님께서 이 일만큼은 기꺼이 수락하시게 된 이유는, 지금 이 성경공회를 통하여 추진하고 있는 과업이 이 대한민국의 보수교단에 속한 교회들과 성도들에게는 너무나도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한성서공회에서 1961년에 발행한 '개역한글판'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옛날 말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된 성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성서공회에서 새로 출간한 성경들은 모두가 다 천주교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번역한 것들이어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1월에 한국의 보수 기독교단들이 모여 성경공회를 창립하고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새로운 한글번역 성경 발행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번역을 마무리하고 발행하는 단계에 와서 원로목사님께서 이 중차대한 일을 맡으신 것입니다.
  이 새 한글번역 성경의 발행은 실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남을 큰 전환점의 하나가 될 것이며, 우리 경향교회가 이 일에 함께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성경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 성경공회가 새로 출판하고자 하는 한글번역 성경을 비롯하여, 지금 전 세계 교회에서 각 나라말로 번역되어 있는 '역본(譯本)'들이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성경책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역본은 원본이나 사본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당신을 직접 계시해 주시는 가장 현실적인 성경입니다.

  본문 26절부터 31절에 기록하기를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에디오피아는 나일강 상류에 '구스' 족속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였으며, '메로에 왕국'과 '나비다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메로에 왕국을 통치한 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간다게" 왕조였습니다.
  즉 여기의 '간다게'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처럼 그 왕조의 왕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
  그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라고 했으니 일종의 재무장관과도 같은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병거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물론 이사야서인데, 그 이사야서가 포함된 책은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선 이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이었으므로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나중에 32절과 33절에 인용된 내용을 볼 때, 그것은 바로 '70인역(Septuagint 혹은 LXX)'이라고 불린 성경이었습니다.
  이것은 주전 270년경에 완성된, 가장 오래 된 '헬라어역 구약성경'입니다.

  구약 시대에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남북조의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로마제국 시대까지도 제국 산하의 각국에 섞여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역시 어디를 가도 구약성경책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의 자녀들이 점점 히브리어로 된 성경책을 읽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그리스어, 즉 헬라어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어린 자녀들은 헬라어만 알게 되고 히브리어를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 2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원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던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70인역'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나 사도의 친필로 기록된 '원본' 성경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신구약 66권 중에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만약 성경의 원본이 남아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것 자체를 우상처럼 섬겼을 것이고, 또 그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사본' 성경인데, 이것은 아직 인쇄술이 없던 당시 그 원본 성경으로부터 필사자들이 손으로 직접 그대로 베껴 쓴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본에는 사람의 실수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사본과 사본 사이에는 실로 미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차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나중에 37절에 보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37절이 일부 사본들에는 나와 있고 성경에 장과 절을 표기하기 시작했던 초기의 역본은 그런 사본을 따라서 번역을 했으며 저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도 그 한 예이지만, 보다 권위 있는 중요 사본들에는 이 37절의 내용이 없는 까닭에 오늘날 새로 번역된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절을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본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역본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70인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역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도 이미 구약성경의 원본은 없었고 사본만 남아 있었지만,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던 성경은 바로 이 '70인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단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처럼, 당시 헬라어를 아는 각 나라와 민족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읽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이 역본 성경을 통하여 그를 만나고 그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자기 민족 고유의 종교가 있었을 것이고 고유 언어도 있었겠지만, 이 성경이 자기가 아는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복음에 접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본 성경은 전 세계에 언어와 문화와 민족과 나라의 장벽을 다 초월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아주 소중한 성경책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에도, 그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갖다 붙인 것보다 실제적으로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은 마침 발명되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서 많은 대중들의 손에 직접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비로소 평신도들도 자기 손에 성경을 소유하고 자기네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 그처럼 성경 말씀으로 무장된 평신도들이 결국 종교개혁의 주력부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로마천주교는 오직 라틴어로 된 성경책만을 썼으며 그것도 오직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천주교의 미사라는 것은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된 예식서(the Liturgy)만 낭독하면서 진행하는 판에 박힌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라틴어에 무슨 특별한 영감이나 들어있는 것처럼 행세했겠지만,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평신도들에게 그런 전례식문이나 기도문은 무슨 마술적인 주문처럼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경의 계시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가 있었겠으며, 사람들 성경에만 계시된 참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년에 걸친 중세의 영적 암흑은 이처럼 사람을 성경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야기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자기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책이 교인들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성경 위에 제대로 세워지게 되었고 신자는 하나님의 진리 계시를 직접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책이 번역됨으로써 기독교는 기독교다운 기독교로 회복된 것입니다.

  빌립 집사의 전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전도자들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직접 전도하는 것이며 전도자들은 그 성경에 의지하고 그 성경을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 선교사들이 번역한 '쪽복음'이 전도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지금 선교사들 중에도 성경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실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이 성경을 통하여 사람에게 밝히 계시되었고,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는 원본 성경이 사본을 거쳐서 이 역본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대한 사명인지를 꼭 깨닫고 공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역본은 어학적인 오류는 있어도 복음 진리의 전달과 택자 구원이라는 목적 달성에는 아주 충분한 성경입니다.

  32절 이하 38절까지의 말슴에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없음) /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여기 32절과 33절에서 빌립이 그 에디오피아 내시와 함께 읽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70인 역'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역본이 다 그러하듯이 이것 역시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는데, 본문에서 그 사실이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우선 32절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이사야 53장 7하반절에 기록된 사실과 별 차이 없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33절에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는 내용은 원래 이사야 53장 8절에 기록된 내용,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는 말씀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그 '70인역'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이 부분을 좀 애매하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번역에 부분적인 오류가 있었던 책이라 할지라도 그 '70인역'은 그 에디오피아 내시로 하여금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 얻도록 만들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그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이 비록 어학적인 면에서 실수는 했다 할지라도 일단 그들이 번역하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만은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70인역'을 가지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고 있는 빌립 집사가 그 성경 말씀의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전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어학적인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신학적인 오류만 없으면 그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 성경 기록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는 사실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혹자는 지금 성경의 원본이 하나도 없는데, 사본과 역본만을 가지고 어떻게 정확한 진리가 전달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한 1미터의 절대치라는 것은 지구 자오선 길이의 4천만 분의 1에 해당되는 길이이며, 프랑스 어디엔가 그 '1미터의 원본'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자들은 그 원본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볼 때 절대적으로 정확한 1미터 길이의 자라는 것은 어떤 공장에서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본 1미터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갖가지 '복제 1미터'의 자들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기에는 아주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역본 성경의 실용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그것도 수천 년 전의 고어를 현대어로 번역할 때 100퍼센트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학적인 오류는 그 어떤 역본이라도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차이는 실제적으로는 아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본의 근원이 되는 원본 성경이 '정확무오하고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완벽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역본 성경의 진짜 문제는 어학적 실수가 아니라 신학적 오류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는 경우인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비록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같은 기독교인 범주에 들어가 버리지만 사실상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과는 신앙 본질에 있어서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of) 말씀"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에 관한(about) 말'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느낀 바, 체험한 바, 나름대로 믿는 바를 고백하고 간증하고 기록해 놓은 글'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관은 자동적으로 엄청난 신학적 오류와 이단 사상을 파생시키게 됩니다.
  성경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살던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름대로 믿던 신'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살던 종교생활'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자연히 이들은 종교다원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이들은 성경 전체의 주제가 신구약을 통하여 공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동의하지 않고, 성경 기록의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 영생으로 인도함에 있다는 사실 역시 고개를 내젓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게 될 때에는 사소한 어학적 실수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해독(害毒)이 그 해당 역본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구절절 배이게 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1977년에 발행한 '공동번역'은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의 합작품으로서, 번역상의 문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우선 성경이 아닌 외경 7권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책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더 높이고 있는 천주교의 이단적 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한성서공회에서 1993년에 소위 "보수적인 정신과 한국 교회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해서 발행했다는 '표준새번역'의 경우 역시 그 번역자들 중에서 '보수주의' 신학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또한 그들을 선정하는 과정도 '한국 교회'들의 교단적인 추천이나 파송의 절차도 없이 독단적으로만 진행됨으로써,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본들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닌, 천주교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기초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아주 중대한 단어와 문장에 있어서 '어학적인 실수'가 아니라 '신학적인 차이'가 뚜렷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이란 명칭을 '하느님'으로 번역함으로써 천주교의 범신론 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표준새번역'은 '여호와'라는 명칭을 '주'라고 바꾸어 버렸는데, 비록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성호를 감히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주'라고 바꾸어 읽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이 성경 읽을 때의 문제였을 뿐이지, 성경의 원문에 어엿이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번역자들이 함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번에 성경공회에서 발행하게 되는 새 한글 역본은 그 번역에 있어서 어학적인 오류는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신학적인 오류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유일신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가 성경 계시의 주제이며 그 복음을 통한 죄인 구원이 성경 기록의 목적인 것을 확실히 믿는 신자들에게는, 역본을 통하여서도 원본 성경의 감동력과 원본 성경에 기록된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복음 진리가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이 성경공회의 새 번역 사업을 통하여 이 민족의 미래에 참된 구령 운동의 큰 열매를 함께 거두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읽는 성경 구절'은 바로 최초의 역본 구약성경 '70인역'에 기록된 이사야서였습니다.
  그의 시대에도 원본은 이미 없었고 아마 구약 사본도 직접 본 적이 없었겠지만, 그는 그 역본 성경을 자기 손에 들고 있었고 그것을 읽었으며 결국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부분적인 번역상의 오류가 있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었으며, 아마도 그는 그 성경책을 평생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적에 그 학교의 설교학 교수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아주 보수적인 침례교회였고 성경도 흠정역(KJV)만을 쓰고 있었습니다.
  흠정역은 두말할 필요 없이 아주 훌륭한 역본이고 또 영어권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쓰인 전통 깊은 성경이기는 하지만, 아까 본문 37절의 경우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본 선택에 있어서 잘못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목사님께서 당신의 사모님께 그 King James Version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려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모님께서는 자기가 쓰던 그 King James Version 성경을 붙들고 며칠 동안 우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모님께서는 그 성경책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사본 전달 과정과 번역 과정에서 인간의 실수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그 흠정역 성경은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모르기는 하지만 오늘날 어학적으로 훨씬 더 잘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 New International Version 같은 영역 성경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만드는 영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어떤 역본이라 할지라도 100퍼센트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무오'하다는 것은 오직 원본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본이나 역본을 두고 쓸 수 있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에디오피아의 내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사본 역시 개인이 소장할 수는 없으며, 오직 역본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손에 들려지고 우리의 눈에 읽혀지고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경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에 활동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트에 보면 "성경을 번역하고 문서선교를 시작하다."라는 글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1887년에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서 마가복음 등 그 이전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권 성경들을 번역하기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 자신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문으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서민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우리나라말로 번역된 성경책을 실로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잘 보여 주는 한 예가 바로 1898년 5월 4일 자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라는 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평양 사는 교우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 투고 기사에 보면 "한문성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일은 어찌 되었는지 답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온데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남녀 간에 국문으로 번역한 성경 나려 보내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같이 기다리오니..."라는 호소가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요망이 그 선교사들의 성경 번역 작업을 줄기차게 독려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선교사들의 성경번역 활동이 점점 더 발전되어 지금의 대한성서공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여러 단편 성경들이 출간되다가 1911년에 신구약을 합친 '성경젼서'가 나왔으며 이것이 계속 수정 보완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개정되어서 아까 서론에서 언급했던 '개역한글성경,' 바로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우리나라말 역본 성경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대한성서공회를 최근에 새로 발행되는 역본들은 이미 우리의 신앙노선에서 크게 벗어났으며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한국성경공회를 통하여 정말 바르게 번역된 성경책을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성경공회를 통하여 발행될 새 한글 번역 성경 역시 완전무결할 수는 없으며 영원히 쓰일 역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어권에서 King James Version이 기독교사의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소중한 택자 구원과 참된 교회운동에 요긴하고도 크게 쓰였듯이, 이 새 한글 역본 또한 오늘날 조국 기독교계에 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고 전수하는 데에 실로 중대한 성경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비록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성경의 원본은 하나님의 계시의 정확무오한 영감성을 제공하는 절대기준이 됩니다.
  그 원본을 복사한 사본 성경들은 비록 미미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기준이 될 원본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본을 번역한 역본은 어학적인 전달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신학적으로만 확실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고 참된 개혁주의 교회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일에는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히 역사하는' 능력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로 하여금 성경을 못 읽게 만들었던 천주교의 교권주의가 독일어 역본 한 권으로 인하여 깨뜨려짐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며, 바른 신학에 근거하여 번역된 역본 성경이 반드시 있어야 기독교 전체를 이단 사상으로 오염시키려는 자유주의로부터 참된 개혁주의 신앙을 지킬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성경공회를 통한 바른 성경번역과 발행 사업에 대하여 시대적인 사명감을 새로이 다지고 더욱 기도의 힘과 헌금의 후원을 함께 모으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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