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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데려오는 일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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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건축 기공 예배를 드린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앞으로 8주만 지나면 새롭게 완성될 예배당에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60일쯤 남은 교회 완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치고 싶은 뜨거움이 있다.

"주여! 새로운 성전을 완공한 이 교회 위에 선교의 불이 떨어지게 하소서!"
"300만 총력 전도를 외친 감리교의 구호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침몰하고 있다고 말하는 교회 안팎의 평가들이 무색하게 전도의 떨어지게 하소서!"

이런 외침들은 혼자의 독백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이들이 기도하고 성령의 명령 앞에 일제히 순종하며 다함께 부흥을 열망할 때 그 불꽃이 타오르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오목천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사람을 초대해서 모셔오는 명령을 받은 종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지만 사람을 데려오는 일, 그것도 교회의 예배 드리는 자리에 데려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이 준비해 놓은 잔치 자리에 모든 사람들이 초청되지만 응하지를 않는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것을 준비하고 초대해야할 사람을 데려오려 한다 해도 이 성경 이야기 속에 나오는 불응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전도란 본래 처음부터 그런 것이다. 이 모양, 저 모양의 핑계가 있고 애쓰고 노력한 것만큼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 초청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왜, 저들은 잔치 자리를 거부하는가?

1) 시간에 대한 잘못된 선택을 한다. (눅14:18∼20)
눅14:18∼20을 보면, 잔치에 초대된 세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사양을 한다. 그 사양하는 핑계들은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즉, 밭을 산 사람은 부동산을 관리하는 문제로 시간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은 이 소를 가지고 해야할 사업들이 있는데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가를 든 신랑은 신방을 차리고 신부를 기쁘게 하는 것이 결혼한 자의 특권이기에 초대 받은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일상을 사는데 있어서 부동산 관리하고 일터에서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시간만이 최고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인 줄만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좋은 삶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하지 못했다.
사실 밭도 중요하고 소도 중요하고 신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일들이 잠시 멈추어진다고 일상이 거꾸로 가거나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시간, 더 의미 있는 시간을 사용할 줄 모르는데서 잘못된 시간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이란 무엇인가? 백 날을 하고 천 날을 해도 일을 다하지 못한다. 일생의 일을 앞세우고 사는 사람은 결국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한 잔치에 한번 와보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 그것이 시간 선택을 올바로 한 것 같지만 불행한 삶이다. 일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잠깐 잔치 자리에 다녀와도 밭과 소와 신부는 돌볼 수 있다. 아무리 바쁘고 일이 많아도 중단하고 잔치 자리에 비교할 수 있는 교회의 예배에 다녀와도 얼마든지 일주일간 부지런히 일을 할 수 있다. 평생 쉬지 않고 일을 해도 일은 끝나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하던 일이라도 잔치에 갈 일이 있으면 멈추어라. 교회로 초대되어 천국과 영생과 보람있는 삶의 소망을 맛보게 하는 예배 시간에 응해야 한다. 어차피 다녀와서 일상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시간 선택이다. 그러므로 잔치 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잘못된 선택이다.

2) 잔치 내용에 대한 무지함이다. (눅14:15∼17)
주인의 잔치는 보통으로 생각한 잔치가 아니다. 눅14:15∼17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에 떡을 먹는 자가 복되도다"로 시작하는 이 잔치는 눅14:16 '큰 잔치'라고 하였다. 눅14:17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였다. 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는 특별 잔치였다. 이 잔치에는 준비치 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대형 잔치인 것이다. 떡과 음식과 악기와 춤을 비롯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준비된 잔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집과도 같다. 즐거움과 희락과 기쁨이 가득한 곳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베풀어지는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떡이 준비되어 있고 신령한 포도주, 새 술이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서 맛보는 위로와 소망과 용기와 감사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잔칫집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잔치에 와 봐서 안다. 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주일에 교회로 달려오는 것은 이 잔치의 내용을 알기 때문이다. 이 잔치에 와서 새 힘을 얻는다. 진짜로 인생을 사는 맛과 멋을 느낀다. 물고기가 물을 먹고 살 듯 우리 영혼은 춤을 추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잔치 내용을 모르기에 세상을 살면서 밭을 사고, 경제 활동을 하는 소를 사는 것이 기쁨의 전부인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일만 하는 자들의 불행이다.

3)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눅14:17)
눅14:17을 보면 잔치가 준비되었을 때 초청 받은 사람은 이미 청함을 약속하였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예약된 이 사람들이 잔치집으로 오도록 된 이들이 일제히 거절한 것은 사실 겸손치 못한 교만인 것이다. 초청자와의 약속을 헌 신짝 버리듯 버리는 것은 약속에 대한 불성실이다. 아니 그것은 초대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교만인 것이다.
눅14:21을 보면 잔치를 배설한 집주인은 이 불응하는 이들에게 노하게 된다. 그래서 초청한 자를 버려두고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을 한다.
오늘 하나님에게고 초대받으면서도 나오지 못하는 것은 영적 교만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의 죄가 하나님의 초대장을 찢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때때로 교만의 눈과 손으로 쓰여진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 교회의 잔치를 비웃으며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의 교만한 목소리를 듣는다. TV, 신문,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보고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잔치는 구원 얻은 자를 위한 잔치이다.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잔치요, 거절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잔치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 잘못된 선택, 무지함과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초대받지 못하는 저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이 종된 우리의 사명이다. 그것이 충성된 종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다 사람을 데려오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결단하자.
다음의 세 가지를 지니자.

첫째, 열정을 품자.
잔치집의 주인은 종을 보냈다. 그리고 거절을 당하자 눅14:21에 다시 보낸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데려오라. 주인의 종들은 이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다. 그 때 주인은 다시 명령을 내린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바로 이것이다.
잔치집을 채우기 위해 집주인과 그 종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뜨거운 마음으로 집을 채우려는 열정이 있다. 우리에게도 이 열정이 있어야 한다. 힘들고 외면하고 거절하는 자들이 우리의 전도 대상자일지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운다는 열정이 불타야 한다. 열정은 사람의 가슴에 타오르는 불이다. 무슨 일이든 불이 붙은 자가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예술가이든 소설가이든 영화 감독이든 불이 붙은 자가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사람을 데려오기 위한 열정의 불이 붙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하는 일에 불이 타오르고 있는가? 없다면 불을 구하자. 열정을 구하자.

둘째, 계속성을 가지고 시도하자.
초청의 대상이 바뀌어지더라도 초청 받는 사람이 시내와 거리, 골목에서 길과 산울가로 확대되더라도 사람을 데려오는 시도는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누구냐도 문제되지 않는다. 어디 사느냐, 먼 곳이냐, 가까운 곳이냐도 문제되지 않는다. 집을 채우라는 명령에 충실하여 계속성을 가지고 시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옛 말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다. 안될 것 같아도 빗방울에 바위가 뚫린다. 전도는 한 번 시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끈질기에 문을 두드리고 꾸준하게 초청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마침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도해야 한다. 계속하여 시도하자. 울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둔다.

셋째, 어떤 방법으로라도 일하자.
주인의 종이 받들어야 할 명령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이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하여 사람을 데려오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인의 종은 방법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된다. 전도할 수 있다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제한할 필요가 없다. 사실 종은 자기의 외모도 잘 단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지만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를 본다. 신앙 생활은 중심을 보여드리는 생활이어야 하지만 전도 생활은 외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초대장을 들고 간 사람이 다 죽어가는 모습을 하고 간다면 그 주인의 잔치에 올 자가 누가 있겠는가? 단정한 옷을 입고 외모를 업신여김 당하지 않게 하고 가자.
외모만이 아니다.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 동원하자. 김치를 해서 주어야 한다면 김치를 해주고 안마를 해 드려야 한다면 안마를 해 드리고 썩은 채소라도 사야 할 것 같으면 사 드리고 승용차를 대 주어야 할 것 같으면 승용차를 대 주고 금식해야 한다면 금식 기도라도 하고 데려오라. 죄 짓는 것만 아니면 돈을 투자하고 마음을 투자하고 좋은 것을 다 투자하자. 사람을 데려오는 주인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 그리하여 강권하여서라도 집을 채워야 한다.

입당 60여일을 남겨둔 이 아침 우리 모두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을 위한 헌신과 결단의 날이 되어야 한다. 어떤 핑계가 있더라도 열정을 품고 시작하자. 계속적인 시도를 꾸준히 하자.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전도의 일을 하자. 새 성전에 들어간 후 6월 12일은 총력 전도 주일의 날이다. 빈 자리를 채우고 잔치집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 종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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