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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자녀들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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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 숲과 들판 /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 대좌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의 돌들과 뿌리들이 / 이분으로 하여 강녕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 이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 오늘 새삼 /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 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 두 팔에 안고 계신 /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 묵상하게 해 주시는가.“

  김남조 시인이 쓴 “산에 이르러”라는 시입니다. 특히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로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이란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실 그분을 생각나게 하는 사건은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 산에서도, 봄 동산에서도, 또 여름 바다에서도 그분을 뵈올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늘 새롭게 만날 수 있다면 그 삶은 정말 복 있는 삶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태산과 같은 장벽 속에서 그는 오히려 그것을 떠받치고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눈앞에 펼쳐진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예민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평생 섬긴 엘리 제사장이지만 나이 들어 그는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안타까와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께 대해서 민감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앞에서 벌떡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 것 같으면 삶의 순간순간이 감격 그 자체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역사에 감격한 그가 그 사실을 증거하며 찬양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능력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그는 그 사건을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사건을 통해서 모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구원 사건을 증거하면서 먼저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부터 말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들입니다. 또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 사로잡혀 지냈던 존재들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조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이것이야말로 구원 역사의 핵심입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 주신 분 때문에, 아무 희망도 없이 살던 자들에게 참 희망을 주신 분 때문에, 그리고 새 생명을 허락하신 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도 교회와 더불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 가운데 항상 함께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었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은혜에는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조건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조건을 따지신다면 우리는 결코 그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무조건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히틀러, 당신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했습니다. 깊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양하며 기도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민감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노예 상인이었던 죤 뉴턴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라는 찬송이 우리의 간증과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사물을 볼 때 은혜의 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다고... 은혜로 세상과 사물을 볼 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감격하게 될 것이며 입술에 찬송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감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감옥은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 기도실로 바뀝니다. 조그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과 강과 바다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는 도구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삶의 모든 요소들이 예배와 찬양의 근거요 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세상의 수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심하게 다투고 가출한 아들과 화해하기로 작정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정해진 시각에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은혜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감옥에서도 그 은혜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아버지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은혜로 나오지 않고 그 은혜를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아버지가 있습니까? 우리를 품어 주시고 얼마든지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의 시작부터 황혼이 깃들 때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새 생명을 얻었으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특히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0~12 참조) 그러나 먼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어야 하고 핍박을 달게 받을 수 있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감각적으로 뭔가를 즐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하고 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을 믿고 오히려 더욱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로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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