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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가 쓰시려면 (딤후 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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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서 참으로 보물처럼 귀한 삶의 지혜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서 제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주를 위하여 쓰면 풀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예외 없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증거들을 볼 때 ‘주를 위하여 쓰면 그것이 물질이든, 자식이든, 사업이든, 하나님이 형통하게 풀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본시 우리 인간들을 쓰시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대 그리고 목적 없이 태어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시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은사와 재능을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욕심과 야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게 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그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축복을 내리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쓰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되면 당연하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를 받게 되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면 풀립니다. 주가 쓰시면 풀리고 형통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누구를 쓰실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금과 같은 사람과 은과 같은 사람 그리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라면 아마 금그릇과 은그릇 같은 사람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을 다 쓰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금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은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과 바울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볼 때 금 그릇과 은 그릇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대부분은 세상적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무 그릇과 질 그릇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합니다. ‘금이냐? 은이냐? 나무냐? 질이냐?’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와 같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중심으로 판단하신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주를 위하여 쓰기를 원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을 쓰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성경의 죄의 뿌리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욕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쓰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고 형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스스로 풀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저는 그래서 주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흠 없고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몫입니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통하여 우리는 주를 위하여 쓰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까지 부러워할 형통함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가 쓰시면 풀어주신다’라는 명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께 쓰임을 받아 모든 묶인 인생의 나귀들이 풀려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먼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보시는 중심의 두 번째는 깨끗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도 아니요 은 그릇도 아니라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은과 금이 귀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깨끗함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치명적인 무기와 전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하게 하는 것’ 그리고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은과 금이 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은과 금에 관한한 세상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기는 점점 더 악하고 나쁜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문화가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죄가 문화가 된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면 오히려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 안 짓고 어떻게 살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세상. 그러므로 웬만한 죄는 죄로 여겨지지도 않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시대에 따라 죄의 문화가 좀 바뀌는 것 같습니다. 가난할 때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대개 돈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정직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거짓말 하고, 새치기하고, 탈세하고, 남의 돈을 사기치고 떼어 먹는 식의 죄들이 난무하게 되는데 가난할 때는 그와 같은 죄들이 대개 이해되어 집니다. 그러나 부할 때에는 그런 죄들은 오히려 줄어들게 됩니다. 옛날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 하나는 선진국을 여행하다가 가방을 어디다 놓고 갔었는데 몇 시간 후에 가 보았더니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그와 같은 정직의 가장 큰 이유가 부함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후진국을 여행할 때보면 아직도 공항에서 짐을 찾아 나올 때 수화물표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벌써부터 그런 것 하지 않지 않습니다. 누구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법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한번도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부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했을 때는 우리나라도 수화물표를 점검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점점 경제적으로 부해지면서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정직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개인과 나라가 부요하게 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죄의 문화는 성(性)입니다. 개인과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요하게 되면 말과 돈에 대해서는 점점 반듯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반대로 성(性)에 대해서는 문란하게 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벌써 우리나라 안에도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 성을 합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만 허락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성은 그냥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았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코드와 문화를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삶들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 된 것도 그것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답답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성에 대하여 성경과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세상을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돈과 말이었습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넉넉한 이 때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코드는 성(性)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그릇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성적 순결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히 여기시고 쓰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깨끗하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우리들을 쓰시기 위하여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우리를 쓰시기 위하여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크고 많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하여 지불하시는 대가가 엄청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 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 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5-7)

형통한 삶을 원하십니까? 묶인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풀려나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여러분 정말 원하십니까?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면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하시면 모든 묶인 나귀들이 풀릴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확신합니다. 저는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공부하고 돈을 벌고 하는 모든 일들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여 쓰기 위함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아이들이 그 모든 것들을 다 주를 위하여 쓰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면 100% 틀림없이 내 아이들의 인생의 모든 묶인 것들이 풀리고 형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죄에 대하여 무뎌진 마음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애통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하셨으며(마5:4),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51:17)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괴로움이 지나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흔들릴 때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다 했습니다.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고,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만큼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그의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서 자신을 죄는 많으면서도 뉘우침조차 사무쳐 오지 않는 불모의 사막과 같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나와 함께 떡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사람이라고까지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지만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네가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정말 닭이 울 때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죄에 대하여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닭 소리에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죄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 죄가 아프지 않은 사람, 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포함한 저와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죄 짓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인줄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와 싸우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히 12:4)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마음과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 만이라고 그렇게 싸워 하나님께 대한 인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미 그와 같은 징조들이 보여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교회와 교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은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인색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온전하고 흠 없는 십일조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윤동주 시인과 같이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예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조그마한 죄로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신 깨끗한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큰 그릇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세상이 그를 묶을 수 없습니다. 잡을 수 없습니다. 자연 형통하고 복 받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설교의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11:1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의 말씀을 침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열어 주신 천국과 축복을 쟁취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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