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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별력 있는 삶(1): 어리석은 나발 (삼상 25:2-13,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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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 중에 미덕, '분별력'>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급하게 국회에 출석할 일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운전기사가 과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교통순경이 딱지를 떼려고 하자 운전기사가 호통을 쳤습니다.
뒤에 타고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고 큰 소리를 질렀던 것이지요.
교통순경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라고 가볍게 대꾸했습니다.
운전기사가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사람아, 저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처칠 수상이란 말이야!"
그러나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도 교통순경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 분이 우리 처칠 수상님을 닮기는 했으나 우리 수상님은 교통법규를 어길 분이 아닙니다."
결국 교통순경은 끝까지 버티면서 딱지를 떼고서는 수상의 차를 보내주었습니다.

처칠 수상은 차안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비록 말단에서 근무한 경찰관일지라도 저렇게 철저히 법을 집행하니
영국의 앞날이 밝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날 30분이나 늦게 국회연설을 하게 된 처칠은 자신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고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교통순경을 칭찬했습니다.
그랬더니 국회의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일어나 처칠에게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때 처칠은 "이 박수는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 법을 잘 집행한
그 경찰관에게 보냅시다." 해서 또 한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요즈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정치인들의 '골프 황제'니 '테니스 황제'니 하는 시비를 생각해봤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특정 인물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도 해봤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개 죽이기'의 시나리오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사실 골프 한 번 치고, 테니스 좋아해서 운동하는 것,
한 사람의 정치 생명을 끝낼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별 문제 아닌 것을 공연히 침소봉대(針小棒大)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을 대표하는 두 정치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분별력이 좀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왜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공격받을 여지를 주었을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큰 비리로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까짓 것 운동 좀 했기로서니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도 큰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분별력,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미덕 중에 참 귀한 미덕입니다.
옳고 그름을 잘 헤아려 판단할 줄 아는 힘이 분별력입니다.
센스가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별해내는 힘이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영국의 교통순경이나 처칠 수상은 참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일단 경찰복을 입고
근무하는 그 순간은 교통법규를 철저히 집행하는 일이 경찰관의 사명입니다.
영국의 수상이 탄 차라고 할지라도 엄격하게 자기 소임을 다한
그 경찰관은 확실히 분별력 있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흐뭇한 미소로 받아 준 처칠 수상은 더 큰 분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수상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골프와 테니스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공무원으로서 분별력이 많이 모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분별력이 없어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발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는 사무엘상 25장>
제가 본문 말씀을 읽은 것은 40일 새벽예배 시간에
아비가일에 대한 설교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단연 '분별력'에 대한 말씀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크게 세 사람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나발과 그 아내 아비가일, 그리고 다윗입니다.
물론 다윗의 부하들과 나발의 일꾼들도 등장인물로 나오고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나발과 아비가일과 다윗입니다.

이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벌어지는 이 에피소드의 주제는 '분별력'입니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 승리하고 분별력 없는 사람이 망한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서 읽느냐에 따라 교훈도 달라집니다.

저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삶'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되,
오늘은 나발의 시각에서, 다음 주에는 아비가일의 관점에서,
마지막 주에는 다윗을 주인공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삼상 25장의 말씀을 나발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을 경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온이라는 마을에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은 '어리석다' '미련하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아마 무척 미련하고 고집스러워서 이름이 나발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나발의 아내가 바로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이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이해심도 많았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나
나발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아주 포악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발은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 옛날 고대근동 지방에서는 가축을 많이 기르면 부자였습니다.
나발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나 되는 아주 큰 갑부였지요.

어느 날 나발이 갈멜에서 일꾼들을 거느리고 양털을 깎았습니다.
양털 깎는 날은 축제일로서 아주 기분 좋은 잔칫날입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서는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 보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도움을 청했던 것이지요.

이 때 다윗은 600명의 용사들과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이리 저리로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그런데다가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사무엘도 세상을 떠나 마음이 몹시 울적할 때였습니다.
마음도 슬프고 이곳 저곳을 쫓겨다니며 피곤했고 양식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부하들이 평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나발을 생각하고서는 먹거리를 요청합니다.

본문 5-8절을 보면 다윗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10명의 부하들을 보내어
정말 예를 다 갖추어 아주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먼저 인사말부터도 극진한 예의를 갖추어 했습니다.
그런 뒤 다윗의 부하들이 어떻게 나발의 가축들을 지켜주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나발의 목자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괴롭힌 일이
없을뿐더러 양들을 보호해주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윗과 그 부하들은 나발의 목자들에게 은혜를 끼친 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잔칫날, 양털 깎는 날에 젊은 부하들을 나발에게 보내니
나발 어른의 종들이라 생각하시고, 또 다윗은 어른의 친아들이라 생각하시고
양식을 좀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9절에 보면 다윗의 부하들은 정말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부탁했고
차분히 나발의 처분을 기다렸습니다.
자, 그런데 나발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10-11절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 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 말씀을 좀 보세요.
나발의 태도는 아주 무례하고 모욕적입니다.
다윗에 대해 인신공격부터 먼저 합니다.
"도대체 다윗이라는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란 자가 누구냐?"
다윗의 부하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다윗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는 부하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분노를 느꼈을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중하게 양식을 구했던 것까지 핀잔을 주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요즈음 종들이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빵이나 물이나, 내 양털 깎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다윗과 상관없는 제 삼자가 들어봐도 지나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즉각 다윗에게 돌아와 나발의 망발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분노한 다윗은 그 자리에서 600명의 부하들 중 400명에게
완전무장을 시켜 나발 일가를 죽이기 위해 떨쳐나섰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나발, 선을 악으로 갚은
나발 같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자, 나발 일가를 응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 출전한 다윗 일행을
아비가일이 어떻게 설득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다만 나발에만 관심을 집중해봅시다.
여러분, 나발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없는 사람입니까?
나발이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나발이 분별력 없는 사람이 된 이유는?>
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정이 앞섰습니다.
다윗의 부하 10명이 양털 깎는 축제일에 나발에게 찾아왔습니다.
기분 좋은 잔칫날에 찾아왔으니 잘 대접해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이 다윗이 누구입니까?
아무리 지금은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는 망명자 신세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발이 이런 망발을 해서 안 됩니다.
더욱이 다윗의 부하들이 자기 양떼와 목자들을 잘 보호해준 적도 있습니다.
나발은 다윗에게 신세 진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을 잘 선대해서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어떤 놈이며 이새의 아들이 어떤 자란 말이냐 하면서 다윗을 깎아내렸습니다.
지금 먹을 것이 떨어져 양식을 구하는 다윗의 요청에 내 일꾼 위해 마련한
양식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줄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거절을 해도 정중하게 기분 좋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아주 모욕적으로 기분 나쁘게 거절했습니다.
이러니 다윗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다 죽이겠다고 쳐들어간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발이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말입니다.
무대 뽀라는 일본말이 있는데 나발이야말로 '무대 뽀의 화신'이었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금만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자기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언제나 기분 내키는 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감정적인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는 한 절대로 상대편과 원만한 대화를 열어나갈 수 없습니다.
가슴에 쌓은 감정만 가지고 나가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분별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조금만 차분해져 보십시오.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리하면 사태의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② 욕심이 지나쳤습니다.
나발의 두 번째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는 거부로서 양과 염소 떼만 거느린 숫자가 4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지금 양식이 떨어져 어려움에 처한 다윗 일행에게 조금만 도와줘도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나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 일꾼들 위해 마련한 음식을 왜 남에게 준단 말인가?
자기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음에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나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놓고 볼 때 얼마든지 곤궁에 처한 다윗 일행을
도울 수 있었는데 욕심 때문에 그만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가면 운조루(雲鳥樓)라는 집이 있습니다.
조선 영조 임금 때 벼슬살이를 한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집입니다.
이 집은 크기가 99간이나 되는 큰 양반집인데 흥미로운 쌀뒤주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쌀뒤주 밑에 가로 5cm, 세로 10cm의 조그만 구멍을
만들어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도 있습니다. 
그 마개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글씨를 새겼습니다.
류씨 집안이 주변에 가난한 이웃들이 마음대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이 뒤주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직접 주지 않고
뒤주에다 쌀을 넣고서는 은혜를 베풀었을까요?
그것은 가난할망정 주인에게 직접 쌀을 받아 가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남 몰래 자기 필요한 만큼만 쌀을 받아가도록 배려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나발이 류이주 선생한테 이런 정신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발은 지금 모든 것이 넘쳐나는 부자 중에 부자입니다.
굶주려 있는 다윗 일행에게 먹을 것을 조금 나누어주었다고 해도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류이주 선생처럼 티나지 않게, 다윗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나발은 자기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그것을
못했기에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나발처럼 탐욕으로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③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삼상 25장에 나타난 다윗과 아비가일 이야기는 '상황판단'과 '비전'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읽으면 다 해독이 됩니다.
"나발이나 아비가일이나 다윗이나 다윗의 심부름을 했던 10명의 부하들,
나발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했던 모욕적인 언사를 안주인에게 보고했던 나발의 일꾼 한 사람, 과연 이들이 상황판단을 적절하게 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 가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다음 두 주일 동안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나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뛰어난 상황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해서 지금 당장 필요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도무지 현실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자기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장차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는 물론이고 자기 집안의 모든 남자들의 씨를 말릴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지금 다윗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시고 큰 대(大)자로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센스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돌아가고 있는 일에 대한 상황판단도 되지 않고
미래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장차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지금 불우한 처지에 놓여있는 다윗 일행을 잘 대접해 놓으면 나중에 보상이 주어집니다.
자기가 배고파 굶주려 있을 때 도와준 사람을 인정 많은 다윗이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나발에게는 장차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황금의 기회가 찾아왔는데도
그 축복을 제 발로 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여러분, 오늘 지금 여기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반드시 미래에 일어날 비전을 염두에 두고 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장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당장만 보고 결정해서 안 됩니다!
나발처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무모한 욕심 때문에 감정적인 언사를 내뱉어서 안 됩니다!
미래에 일어날 분쟁과 화를 미연에 방지하십시오!
지금 조금 손해보고 기분 나쁘더라도 미래에 주어질 더 큰 축복과 기쁨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은 분별력 있고 슬기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돌처럼 몸이 굳어 죽은 사나이 나발>
결론을 맺겠습니다.
나발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노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 담판을 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나발은 술에 만취해 큰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밝아 나발이 술에 깼을 때 아비가일이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다 말했습니다.

37-38절 말씀을 보세요.
나발이 아내의 말을 듣고서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 열흘쯤 지났을 때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
두려운 나머지 전신이 마비될 지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결국 나발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뉘우치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치시매 나발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발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합니다.
나발처럼 어리석고 완고하고 욕심 사납게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롭고 센스가 있어서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해서 적절하게 대처해나가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다 나발을 반면교사 삼아 분별력 있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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