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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씨앗을 심자 (마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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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씨앗을 심자(마태복음 17:14-20)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더랍니다. 욕탕에 들어 간 아버지에게 아들이 물었습니다. “뜨거워?” 아버지, “아니, 아주 시원하구나.” 그래서 욕탕에 발을 넣던 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앗 뜨거워” 그리고선 한다는 말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우스갯소리입니다. 그러나 서로 믿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어 주는 소리입니다.
믿을 수 없는 세상 이라고들 합니다. 믿을 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믿음으로 삽니다.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해가 진다는 것 의심 없이 믿고 삽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면서 ‘갑자기 추운 겨울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가르치고 말고 할 것 없습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간직한 믿음입니다.
이성적 믿음도 있습니다. 이성적 믿음이란, 경험과 과학적인 지식으로 얻어지는 믿음입니다. 은행에 가서 예금도 하고 또 은행에서는 대출도 해 줍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 주사도 맞고, 심지어 수술도 합니다. 그것은 의사가 과학적인 훈련을 받고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내 병을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성적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비행기를 타도 다니는 것도 다 이 이성적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무 것도 믿지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곧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유명한 재벌 하워드 휴즈. 그는 말년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극도의 불안과 의심 속에서 불행한 인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20억 달러를 모은 억만장자였는데 그 마음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병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호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살았습니다. 수염은 배꼽까지 이르고, 뒷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손톱 발톱은 너무 길어서 구부러지고, 음식을 볼 때 병균을 두려워 한 나머지 스프밖에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20억 달러를 모은 재벌 총수였지만, 그가 죽을 때에는 너무 못 먹어서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비참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이 말은 거짓말이며, 정말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거기에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광경을 본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산꼭대기에서 당신을 찾으러오는 사람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백성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것은 “신이 죽음에 잡혔다.” “신이 죽음에 먹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합니다. “신은 죽음에 뛰어 들었다.”
요한복음 1:1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찾아오신 분 예수. 그래서 뭐라 그래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산으로, 들로……. 그들은 빌러 갑니다. 우리들은 만나러 갑니다. 예배 ‘본다.’ ‘드린다.’ 어떻든 만나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산꼭대기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빛이 나는 얼굴, 빛이 나는 흰 옷.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이 산 위에 계셨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들겠는가를. 만약 그렇다면 십자가 지고 죽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산 아래. 간질로 심히 고생하는 아이와 그 아이를 눈물과 고통으로 돌보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산 아래.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눈물과 고통과 절망이 있는 곳. 끝내 영원한 죽음이 있는 곳.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돌아오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아이는 가끔 불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막 9:19) 공동번역은,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아이의 병이 낫는 것 하고 믿음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본능적인 믿음이라면, 이 아이의 병이 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이성적인 믿음이라면 그 아이를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으로는 그 아이를 고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병자가 고침 받는 믿음인 것입니다.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가을 다음에 겨울을 믿는 그럼 본능적인 믿음으로는 아이가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자동차나 비행기 타는 그런 믿음으로도 아이가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하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믿음은, 병자가 고침 받는 믿음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믿음입니다. 이 아침에, 전 성도 여러분이 그런 믿음을 간직하시길 축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뒤에, 사람들이 없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다.”
겨자씨만 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주님을 믿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1)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겨자씨의 비유. 물론 본문에서는 지극히 작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는 작다기보다 생명이 있다는데 그중요성을 두었습니다. 누가복음 13:19에서, 겨자씨 자라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으니까, “겨자씨 작다. 그러나 뿌리내리고 싹이 나고 자라면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란 살아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믿음 역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살아있어야 하고, 그래서 성경은 곳곳마다 믿음이 자라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13-1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 또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요동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까지 자랄 수 있어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까지 목표를 두고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 가운데 골로새교회에 감사, 데살로니아 교회에 감사가 있는데 그것은 특히 교회의 믿음의 성장에 대해 감사입니다.
골로새서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데살로니가후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여”
자라나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2)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믿음, 자라는 믿음이 될까?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에베소서 4: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밭에 씨 뿌리고 그냥 두면 되는 것 아닙니다. 물을 대주고 비료도 주고 영양이 공급 되어야 합니다. 이 영양분이 없으면 신앙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와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성장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 그것은 곧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네가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많이 배었느냐? 사회적 직위가 얼마나 높으냐?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야 성장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성장 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안다는 것은 세상 지식을 아는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들어야 합니다. 주일 낮, 오후, 수요일 저녁, 기회만 있으면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귀신 왕 바알세불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면 그런 소리 안했을 것입니다. 가끔 이단에 빠지거나 신앙생활에서 헛소리 하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는 게 없어 그런 겁니다.
신앙은 뜨거운 열정입니다. 마치 불과 같습니다. 그냥 두면 아무거나 다 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바른 신앙을 갖게 합니다.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왜 믿어야 하는지, 구원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이 “안다”고 하는 말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 아닙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누군지 아시지요? 한국의 대통령이 누군지 아시지요? 미국 대통령하고 한국 대통령하고 누구를 더 잘 알아요? 그런데 정말 그분들을 잘 알아요?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는 대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6,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마침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실천함으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전화번호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주 쓰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씨앗을 땅 속에 심지 아니하고 선반 위에 그냥 두면 영원히 그대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뿌리 내리고 자라고, 그래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 아는 대로 사는 삶을 통해 성장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연단을 통해서도 성장합니다.
배추 잎 파리는 연약 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 쪼입니다. 때로는 바람이 이파리를 날려 보낼 것 같습니다. 비가 쏟아지면 뿌리 채 뽑힐 것 같습니다. 때로는 벌레가 먹어 이파리에 구멍이 송송 났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배추는 자라납니다.
야고보서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우리의 믿음이 강한가, 약한가 하는 것을 판단할 때의 표준은 인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에도 이 인내를 보고 주십니다. 시험이 다가와도, 환란의 풍파가 닥쳐와도 끄떡하지 않는 인내의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만큼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믿음이 깊지 못해 그 복을 간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에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도 다 새어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시련을 먼저 보내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귀한 보석이 다이아몬드입니다. 이 다이아몬드는 땅속 깊은 곳에서 수천 년 혹은 수 만년 동안 땅이 누르는 압력을 받고, 뜨거운 열을 받음으로서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에서 인공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냅니다. 숯에다가 무려 150만 파운드의 압력을 가하고, 화씨 5천도의 열을 가하여 다이아몬드를 만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믿음으로 자라도록 압력과 열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 압력과 열이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회사나 이웃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이런 압력과 열로 아무런 가치가 없던 우리들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진 존재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했을 때 그 나이 75세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안정되고 정착한 삶을 산 것은 100세가 넘어서였으니, 25년 동안 그는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는 궁중에서 40년 동안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땅에서 40년을 지난 뒤에야 하나님의 일꾼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고 종살이, 감옥살이를 거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외도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내로 그들의 영적인 믿음을 자라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 하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환난이나 어려움도 인내로서 이겨내는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음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넉넉한 것을 채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것을 믿기에, 사도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 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때를 따라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풍성함은 반드시 심은 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7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겁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진리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믿음의 씨를 심으시기를 빕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주님은 결코 허황된 말씀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과장된 말씀도 하시지 않으십니다. 믿음을 가진 자,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는 내 말대로 해 보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심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심든지, 재능을 심든지, 시간을 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심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연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해 안타가워 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며 그 금식하여 모은 쌀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믿음을 심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크게 복을 주셨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난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리아 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리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다급하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면서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 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믿음의 씨앗에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넉넉하게 풍성하게 쓸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믿음의 씨앗을 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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