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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할 때에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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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절 한 절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경은 신약의 빨간 줄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 외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눈여겨보면 빨간색이 아닌 구절이 더 많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내 생각에는” 또는 “주님으로 받은 명령은 없지만” 그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액자로 걸어 놓는 성구 중, 욥 8:7,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통당하는 욥을 찾아온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잘못 했으니까, 네 자녀들이 하나님께 득죄했으니까 당한 일 아니냐? 그러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면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한 겁니다.

시편 23편에의 글은 다윗의 글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합니다. 그러나 욥기 8:7은 욥을 찾아온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문구가 좋다고 시용한다면,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문구는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 말은 마태복음 4:9에 나오는 말로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물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 마귀의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는 마귀의 말도 있습니다.
왜 조심스럽게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이런 책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나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설교도 엄격히 따지면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겠습니다.” 그럽니다.
바울서신은 바울 사도가 살아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설교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도 있고, 마귀의 말도 들어 있지만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 하셨고,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일러준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분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실 수도 있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도 끄떡도 없으실 분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예수님께서 만드셨는데 그것을 아는 마귀는 예수님을 꼬드긴 겁니다. “‘너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의 꼬드김은 물론, 당신의 뜻도 버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것이 곧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고, 그래서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서신도 그래요. 그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고린도 사람들, 로마사람들, 그들에게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서신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으며,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설교 역시 듣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된 말씀, 설교를 선포된 말씀, 예수님을 계시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볼 때, 인류를 구원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전체적인 목적 아래에서 보고 이해해야지, 어느 한 구절만 뽑아서 읽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면에 속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머리가 갸우뚱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본문 20절, 21절.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은 22절, “하나님을 믿으라.” 하시고, 23, 24, 25절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의심치 말고 믿으라,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라,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말씀과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아 말라 버린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2절부터 14절까지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따로 떼어 놓고 읽습니다.
‘버트란트 럿셀’이라는 사람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무화과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13절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 당시 그곳의 무화과는 년 중 두 번 따게 됩니다. 지난해 싹에서 자라난, 조금 이르거나 작은 무화과는 3월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5, 6월에 익고, 봄에 나온 새싹에서 자라난 조금 늦고 더 큰 무화과는 8월에서 10월 사이에 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유월절이 가까운 때이기에 대략 4월쯤 됩니다. 따라서 무화과가 익을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럿셀이라는 사람은 무화과가 익을 때가 아닌데 왜 예수님은 실과가 없다고 저주 했는가? 예수님은 뭘 모르거나, 성미 급한 사람은 아닌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달릴 때가 아닌데 열매 없다고 저주하면서 뿌리부터 마르게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 열매 없는 철에 열매 없다고 저주를 하신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우물가에서 숭늉 찾다가 없어서 우물을 부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해석 할 때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나무인데, 당시 유대인들의 겉만 번지르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것은 15절부터 나온 성전 정화 이야기가 뒷받침을 해줍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지내기 위한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내세워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성전 뜰 안과 밖이 시끌벅적해서 굉장하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도리어 폭리를 취하는 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드리는 제물이라는 이유로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값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같지만 속은 욕심으로 가득 찬 그야말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 겉모습만 있고 실상 알맹이는 없는 유대인들에게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때냐 아니냐 보다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상황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똑 같았고,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 말라버리듯이 유대지도자들도 결국 저주받아 말라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 그런 이야기이구나.’ 하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아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에 대한 베드로의 말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엉뚱한 대답입니다. 동문서답 같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이 저주받아 말라 죽은 것 하고, 믿고 기도하는 것 하고 무슨 관계인가? 억지로 해석하면, 믿고 기도하면 무화과 때가 아닌데도 열수 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고들 하니까요.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다시 말해 산을 바다로 빠뜨리게 되는데, 그까짓 때가 아니라고 열매를 못 맺는단 말이냐는 겁니다. “기도가 없어 그렇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절 한절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좀 더 분명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든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이 저주 받아 말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열매 없는 형식적임 믿음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열매 없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자기들의 주머니만 챙기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2에서 그런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산을 옮겼느냐 안 옮겼느냐 하는 외형적인 것 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나타났는가 하는 알맹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산을 옮겼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은 이적을 행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귀신들, 적그리스도들도 그런 것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산을 옮겼느냐 안 옮겼느냐 하는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그 속에 있는 알맹이가 있느냐 하는 것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산을 옮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 했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 섬기기보다는 이방신을 섬겼다. 출애굽할 때 60만 명(장정만)이 겨우 두 명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야말로 잎만 무성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었지만, 유대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에 씌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자기들의 생각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로 먹은 사람이 오천 명(장정만) 그러나 다 떠나가고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잎만 무성한 겁니다.

마태복음 17:20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기를 비교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만큼’이라고 번역된 희랍어는 ‘호스’라는 비교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같이’ ‘--처럼’ 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겨자씨만한 크기가 아니라, 겨자씨처럼 작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있으면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겉모습은 굉장하지만 실상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열매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속죄의 어린양 같이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 얻는다는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셨다면, 십자가 지기보다 부귀와 영화를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열매 맺혀졌을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가장 귀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그 열매가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맺어야 할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으로 믿지 않는 이들, 원수 되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그것과,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는 것 하고 어떤 것이 더 큰 기적이라 생각하십니까?
24절은 믿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멘입니까?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되었어요?
그럼 복권 한 장 사가지고 “1등 되는 것 믿습니다.”하고 기도하면 어떻게 되나요? 왜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거짓말 하셨어요?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면 된다 하셨는데, 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러셨는데 그렇게 되던가요? 왜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서기도 할 때에 뭐부터 하라구요?
‘혐의.’ 표준새번역은,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라고 했습니다. 그 등진 것을 먼저 사랑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표준새번역 :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 받지 않으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그런 상태로 기도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어떤 원수라도 사랑으로 용서해주고, 형식적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용서해주어야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 받고 그런 후에야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없으면 내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없다면 내 기도가 응답되어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 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는 기도는 열매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기도의 잎은 무성한데, 기도의 열매가 없다는 겁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쳐지는 삶의 길이다.
많은 기도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도는 내 아픔이 있습니다. 내가 미워해야만 할 사람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미워하고 등지겠어요.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면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는 아픔이 없으면 사랑의 기도, 열매 맺는 기도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하기에 저주 받아 말라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경건의 모양만 무성하지 않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경건의 능력이 있기 바랍니다.
행여나 눈에 보이는 기적만을 쫓아다니는 믿음은 아닙니까? 생명이 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열매 맺는 믿음이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용서 받지 못해 말만 무성한 기도는 아닙니까?
이웃에 등진 일 있으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분의 허물을 용서함 받고,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응답되는 기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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