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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롬 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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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수학자 파스칼이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그런 정의를 내렸다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데, 수학자라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중요시하는 전문가이기에 그가 내린 믿음에 대한 정의는 놀아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 역시 놀라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그는 죽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믿습니까? 라고 질문할 때, 아멘! 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내적 동의이며 신뢰입니다.

교회를 10년 다녀도 아멘소리 못하는 분들이 있지요. 부흥회 때 강사님이 자꾸 아멘을 강요하거나 안한다고 부담을 주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 내 심령 깊은 곳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적인 그런 아멘이 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가졌던 생각, 곧 고기잡는 전문가로서의 생각, 대를 이어 뼈가 굵은 자신의 경험적 가치관 등이 잘 나타나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대화 속에서 마침내 베드로는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시기 가장 불편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다른이 아니라 언제나 상식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상식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두 가지 특징적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합니까?"라는 반문입니다. 그들은 이러 부류의 질문을 입에 달고 다니지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일은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함니까?"라는 반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경험이 많은 경력자를 우대합니다만, 그들도 처음은 초보였습니다. 경력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이나 경험되지 않은 일에 대해선 너무나 소심해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로 남들이 걸어간 길만 종종 쫓아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려는 개척자의 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을만한 것은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지금 이 평안의교회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대체로 여러분께서 믿을 만한 것만 골라서 믿는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게시다면 그 공동체는 결코 하나님의 살아계신 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을 때는 이미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허탕을 치고 난 뒤였습니다. 곧 동이 틀 때가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동료들과 배를 호수가에 대어놓고 그물 속에 담긴 잡동사니를 끄집어 내면서 오늘도 허탕쳤음을 아쉬워하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고기를 좀 잡았느냐는 것입니다. "웬 걸요. 지난 밤엔 허탕만 쳤습니요. 지금 빈 그물만 정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이 이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고기를 많이 잡으려면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고기잡이에 대한 것만으로도 주님의 이 제안은 너무나 무지한 데서 비롯된 요구 처럼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고기잡이는 대개 초저녁에 시작을 하여 밤중에 마치는 법인데 지금은 해가 뜰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강이나 호수에서는 대개 깊은 곳 보다는 수초가 있는 얕은 곳에 플랑크톤이 많기에 그 주변에 고기가 많은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셨던 갈릴리 호수, 곧 디베랴바다도 마찬가지여서 깊은 곳은 수심이 80- 100m가 넘는 곳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며 고기 잡는 일에 이력이 난 전문가였습니다. 척하면 삼천리입니다. 어디에 고기가 많고 언제 고기를 잡아야하는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주님의 제안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고기가 많이 잡힐 초 저녁에 그물을 던졌으나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호수 고기가 있을 만한 곳은 그물을 다 던져 보았졌으나 허탕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다가오셔서 말슴하고 있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이젠 상식이 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전문가의 경력이 통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이 시간은 믿음이 필요한 시간인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 욱하는 것이 올라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되는 소리입니까? 뭘 알고 이야기를 해야 통하지요. 혹시 고기는 한번 잡아 보셨습니까?"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없었다는 베드로의 대답속에는 이러한 속상함과 어이없음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차마 대놓고는 말 못하지만 마음 속에는 그런 속내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긴장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말씀으로의 순종이냐 경험에 의한 반발이냐의 기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다시금 고기잡으러 간 단 하나의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 처럼, 베드로 역시 자기의 상식으로 보아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는 결단을 내린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 하셔야 합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게 순종의 믿음이 있는가?"하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어 질 때 늘 상식이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이 억눌림을 받아 힘을 쓰지 못하고 주변적인 위로 수준에서 그칠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스스로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항상 경험이 우선시 되고 자신의 판단이 앞서기에 믿음 한 번 제대로 서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18절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져도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테레사는 인도에서 빈민들을 섬기는 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사실은 믿음에 있어서도 노벨상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캘커타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 때 테레사는 "지금 제게 준비되어 있는 것은 3실링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건축을 할 수 있느냐고 어이없어 하는 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3실링이 전부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 될 때 부족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소유한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감동시키는 대목이 19절에 있습니다.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허황된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일수록 지금 경제가 어떤 상황인지, 정치는 어떤 상황인지, 국제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라고 말입니다. 흔히 "카더라..."는 식의 풍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시대를 분변하는 냉철한 이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일수록 정말로 이 세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봐야 합니다. 현실을 두루뭉실하게 살아가는 거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19절은 아브라함의 현실을 보는 안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자기 아내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

그렇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His body was as good as dead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 완료입니다. 내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거예요. 뿐만아니라 자기 아내 사라 역시 아이를 낳아야 할 엄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의 현재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께서 이 믿음 소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 졌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믿음의 사람으로서 당당히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며 현실의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갔던 것 처럼 말입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는 의미는 믿음이 견고하여 졌다는 고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배가 항구에 와서 닻을 내리면 큰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닻이 갯벌에 깊이 박혀 바람이 불어도 닻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이는 것이지 그 이상은 흔들려 떠내려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닻이 하나님께 깊히 박혀 있기에 주변 상황에 따라 마구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결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라고 여기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23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요 우리도 위함이니, 24절에서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도 똑같은 칭의의 은혜가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모든 사람도 의롭다 함을 입은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바울 사도에게, 그리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전도에 나가고, 우리는 또 세계를 향해서 선교의 발걸음을 중단치 않는 것입니다.

지난 해 우리 감리교만 해도 61개국에 426가정 820여명의 선교사님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바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의롭다 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에 그 선물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세계 만방에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본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안의교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3실링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3실링 밖에 없다고 주저 앉아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상식적으로 된 것입니까? 라고 말하기 보다는 주여, 불구하고 의심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 곧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의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산 믿음을 요구하시는 주님,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노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과학자는 고백합니다.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지만 그러나 믿음은 과학이 아닙니다. 믿음은 상식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것은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 때문인 줄을 믿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이 확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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