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빌라도의 고민 (마 27:11~26)

  • 잡초 잡초
  • 797
  • 0

첨부 1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아주 오래 전 이런 광고 카피가 유행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 혹시 여러분도 기억나십니까? 워낙 오래 전에 본 광고인지라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금성 TV 선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TV 같은 가전제품을 한 번 사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10년은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번 선택하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이 순간의 선택을 잘 해야지 안 그러면 10년 동안이나 “다른 회사 TV 살 걸” 하고 후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순간의 선택을 잘못 해서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백년, 천년도 아닌 영원을 좌우하게 된 인물이 나옵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금까지 2천년,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후회할 일을 하고 만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바로 이 본디오 빌라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혀 죽으시고’라는 부분인데 본디오 빌라도(라틴어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 땅과 사마리아, 이두매(에돔) 지역을 다스린 제5대 총독의 이름입니다. 그의 재임기간은 주후 26∼36년으로서 이 기간에 마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온 것입니다. 하필이면 이 때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재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하필 이 때 예수라는 사람을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까닭에 2천 년 동안 그 이름이 사도신경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기독교 최고의 원수로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빌라도도 얼마나 억울할까요? 빌라도 자신의 운명도 참 비참하게 끝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본디오 빌라도는 사마리아인 학살 사건 때문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했다는 설과 혹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쓸쓸하게 일생을 마쳤다는 설이 전해옵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참한 죽음으로 끝난 것도 억울한데 어디 그뿐입니까? 영원히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입에 부끄러운 이름으로 오르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참 억세게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하지만 절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했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해야 했던 선택은 한 마디로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7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앞의 26:57부터 보면 체포된 예수님은 제일 먼저 유대인의 공회에 끌려가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서기관 장로들 앞에 서게 됩니다. ‘공회’란 유대인들의 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을 뜻하는데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평화유지를 위해 세금만 잘 내면 그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주는 방식으로 통치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의회인 산헤드린이 상당 부분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행정기구 역할을 했고 아주 중요한 결정도 여기서 이루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산헤드린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사형판결을 내리고 그것을 집행하는 권한이었습니다. 사형판결과 집행의 최종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고 그래서 유대인의 공회에서 예수님의 처형을 결정한 후에도 그를 빌라도 총독에게 다시 넘겨주어 최종판결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형여부에 대한 최종결정은 순전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은 이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보십시오. 먼저 예수라는 죄수가 총독 앞에 섭니다. 빌라도는 그의 죄명을 묻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것이 바로 유대 공회가 예수님을 고발한 죄명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예수님을 죽여 제거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당시 유대교의 질서와 유대교 지도자인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종교적인 이유로는 로마 당국이 예수님을 사형시킬만한 죄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가지고 교묘한 술책을 부린 것입니다. 당시에 반란을 일으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로마와 그 밑에 빌붙은 유대인들에 대항하다가 진압되고 반역죄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를 유대인의 왕, 반역 죄인으로 몰아 사형선고를 받아내려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이 이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꼼짝없이 반역 죄인이 되어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분명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의도도 알고, 빌라도가 이 말을 물은 의미도 잘 아셨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그 의미는 다릅니다. 빌라도는 “네가 정말 유대인들이 고소한 대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반역 죄인이냐?”고 물은 것이지만 예수님은 “나는 정말 메시야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핀트가 안 맞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대답만 하시곤 입을 다물고 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별별 모함을 다 하는데도 한 마디 대답도 자기변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이 무죄임을 직감하고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려고 “저들이 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증거로 고소를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묻습니다만 예수님은 여전히 대답을 안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잡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이제 내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이만하면 당연히 사형감이요 십자가형에 처할 죄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라도에게 아주 심각한 고민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이때는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유월절 때인데 로마는 아마도 유대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큰 명절 때 죄수 하나를 석방해주는 관습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체포된 죄인 중에는 바라바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본문 16절에 그는 ‘유명한’ 죄수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악명 높은’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악명 높은 죄인인가? 마가복음 15:7에서 이 바라바를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라고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한 도둑이나 강도가 아닙니다. 당시 열심당원 같은 사람들이 유대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사람이나 그에 빌붙은 유대인들을 죽이곤 했는데 바라바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로 유대인들에게는 ‘감옥에 갇힌 독립투사’로 유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빌라도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18절에 나오는 대로 빌라도 보기에도 예수님이 죄가 없는데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죽이려 드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또 19절에 두 번째 이유가 나오는데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빌라도의 아내 이름은 ‘클라우디아'로 유대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옳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절대 처형하지 말라고 간곡히 설득합니다. 적어도 이 부인은 예수님을 죄 없는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에 관한 꿈을 꾸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상당히 괴로웠다는 뜻인데 죄가 없는 분을 죽이려니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이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빌라도도 이 정도 되면 엄연한 살인죄인 바라바가 아닌 예수를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문제가 생깁니다. 20절을 보세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대인들을 선동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외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또 한 번 묻고 게다가 이런 질문까지 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22절)”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절)” 도대체 무슨 죽을죄를 졌다는 말이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유대인들이 요구하자 빌라도는 자기 소신을 포기하고 맙니다. 아내의 진심어린 충고도 무시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당시 반역을 일으킨 자에게만 처하던 최고형, 가장 잔인한 죽음에 처하라고 더 크게 소리 지르자 빌라도는 결국 그들의 요구대로 결정하고 맙니다. 24절에 빌라도는 자기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이 도리어 민란이 날 것처럼 보이자 두려워합니다. 혹 빌라도 생각에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 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결국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손을 씻는다는 것은 신명기 21:6,7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살해 되었을 때 그 부근 성에 사는 장로들이 손을 씻는 예식을 통해 자신들이 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관습을 뜻하는데 몇 해 동안 유대를 다스린 총독 빌라도는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았기에 이 관습을 행함으로 자신은 이 십자가 처형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다고, 그 죄값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비겁하고 무책임하지요. 그런데도 백성들은 도리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칩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빌라도와 갈 데까지 간 완악한 백성 유대인들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 후 예루살렘 멸망과 2천 년 간의 유랑생활, 나아가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되는 등 비참한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이 큰소리 친 대로 정말 예수님의 피값이 그들에게 돌려진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책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왜 빌라도가 운이 없는 사람, 억울한 사람이 아닌지, 예수님의 죽음을 전적으로 빌라도가 책임 져야할 이유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인간적인 면에서 본 책임으로, 빌라도는 매우 냉혹하고 외곬수의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hus)의 기록에 보면 빌라도가 총독 재임기간에 꽤 많은 사고를 쳤음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13:1에도 빌라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하러 온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의 피가 성전 제물에 튀어 섞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가 저지른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그리심 산에 모세가 감추었다고 알려진 보물을 찾는답시고 군인들을 이끌고 갔다가 거기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빌라도는 해임되고 마는데 일설에는 해임직전 자살했다고도 하고 해임 후 귀양지에서 죽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빌라도는 그의 잔인한 성격, 결코 굽히지 않는 고집 때문에 많은 사고를 일으킨 사람으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사건 역시 이런 그의 성격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합니까? 인간적인 고집이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마련임을, 반드시 교회 안에 사고가 난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책임입니다. 예수님 처형 당시 빌라도 총독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는데 유월절과 같은 큰 명절 때는 예루살렘에 들어와 그곳 치안을 관할하곤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빌라도는 자기 아내와 함께 안토니아 요새라고 부르는 곳에 머물렀던 것 같은데 이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처형을 말린 것이지요. 이 꿈은 분명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꾼 꿈처럼 마태복음은 자주 꿈을 통해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만류를 무시한 것은 빌라도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을 더 우선시 하고,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 눈치를 더 본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대해 인간적인 책임,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시절을 잘못 타고나 우연히 예수님을 못 박은 억세게 운 나쁜 사람도 아니고, 억울한 사람도 아닙니다. 결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라는 한 사람의 결정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까? 적게는 예수라는 죄수와 바라바라는 죄수의 생명을 좌우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영원을 좌우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수많은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1부 예배를 드릴 지, 2부 예배를 드릴지, 예배 후에 밥을 먹고 갈지 그냥 갈지는 여러분 자유지만 한 가지만은 절대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8:21에 갈멜산 위에 선 선지자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촉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그때그때 다르지.” 그들 마음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다리 걸치고 살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잘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빌라도 총독도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는 현명한 판단을 한 것입니다. 내 확신도 중요하고 아내의 말도 옳은 것 같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이지, 지금 나는 로마의 총독 아닌가? 어떻게든지 유대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민란이나 소요가 안 일어나게 막는 것이 내 책임이잖아? 그러니 선택 잘 한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다리 걸치기 식 신앙과 빌라도의 비겁한 선택을 보며 비웃거나 경멸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빌라도만 이런 선택을 할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며 세상적인 일과 하나님의 일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내 신앙적인 확신도 중요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무시하기 어려울 때, 무엇보다 이 선택 하나에 내 이익이나 형편이 좌우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합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빌라도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솔직하게 “오, 주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 다섯째 주일 우리 모두 빌라도라는 사람의 선택을 보면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오, 주님. 내가 아무리 어려워진다 해도, 아무리 손해를 본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진리의 길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