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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등감을 극복하는 지혜 (민 13:30~33, 빌 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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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비호감’(非好感)이란 난데없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사전에도 없는 이 말의 뜻은 호감의 반대말인 악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연예인을 주로 ‘비호감’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비호감’이 전략이 되었고, 호감을 주고 친근감을 가지게 하고, 개성 있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몸짱, 얼짱 시대에 몸꽝, 얼꽝도 튀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엽기나 비호감의 코드로 스타가 된 노홍철, 현영, 지상열, 박명수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통사회의 ‘터부’를 깨고 스타덤에 오른 혼혈스타 다니엘 헤니, 데니스 오 등도 최근에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스타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외모나 성격이 열등감일 수 있지만 오히려 장점이 되게 하고, 비호감이 호감이 되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또 다른 문화코드입니다.

  ‘열등감’이란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을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깁니다. 무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정합니다. 생각이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 못 되고 불안심리를 동반하여 이상행동을 하게 됩니다. 항상 경쟁에서 자기는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은 95%가 열등감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등감이 지나치면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신체적인 기형이 열등감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대머리도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사가 벧엘에서 “대머리야”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합니다. 그 때 산에서 암곰이 내려와 동네 아이들 40명을 물어 찢어 죽였습니다. 엘리사도 대머리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상처나 말더듬이 등이 열등감의 원인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성적, 운동, 그리고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춤치, 자신의 외모, 인종, 심한 사투리, 빈곤, 왼손잡이 등이 열등감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별 것이 다 열등감의 원인이 됩니다.
  열등감을 치료하는 데는 항울제를 쓰기도 하고, 이런 저런 심리요법을 씁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극복하지 않으면 열등감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병이 됩니다. ‘성공’이란 잡지의 창업자인 스웨드 마든은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장애물은 크게 보일 수도 있고 작아 보일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우리 인생의 장애물은 신앙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으로 보면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내세의 축복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원래 말더듬이였지만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후에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첼리스트였습니다. 그는 지독한 근시로 시력이 나빠 악보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악보를 다 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휘자가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되어 그가 지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악보를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지휘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노력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열등감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열등감을 극복하여 성공적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자세에 달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그 열등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열등감 때문에 성공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은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열 사람은 가나안에서 거인들의 후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거인들이 우리를 볼 때에 우리 자신은 메뚜기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해야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민수기 13:33에는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들은 싸우기 전에 이미 패배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적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기고 싸웁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지고 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교회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볼 때마다 겁이 나고, 좌절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 탈출하였지만 애굽인의 병거를 보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수시로 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절망하고, 열등감이 생기고, 패배하였습니다.

  “그 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있지요? 사랑의 위엄인지는 몰라도 작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열등감, 패배감은 하늘나라에서는 절대 금물입니다.

  2001년 3월 5일 미국에서 큰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캘리포니아 산디애고에서 찰스 앤디 윌리엄스라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총을 급우와 교내 청원경찰을 향해 난사하여 2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학생이 총을 난사한 원인은 자신의 체격이 왜소한데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에게 “멍청이”라고 놀렸습니다. 이에 이 학생은 총을 가지고 와서 마구 쏘아댄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빚은 참사였습니다. 나이가 들고 성숙한 사람 같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외모 때문에 가지는 열등감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외모란 자랑도 열등감도 아닙니다. 미국 법원에서 조사한 바로는 외모가 좋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배심원의 형량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단 사기죄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그 외모 때문에 상대에게 속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던 사람도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큰 인기를 얻었었고, 잘 생겨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도니스 콤플렉스’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만을 뜻합니다. 특히 남성들의 외모 집착증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회적 신드롬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세요.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게임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얕보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진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보자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너무 커서 어지간히만 던져도 맞게 생겼습니다. 이것이 이길 수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지난주의 세계야구선수권대회(WBC)를 보세요. 일본이 우승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제일 경기를 잘 했다고 봅니다. 준결승에서 미국과 붙어 졌다면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은데 일본에게 지니 조금 약은 올랐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이길 때에 보세요. 누구도 우리가 미국을 이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입니다. 그들이 메이저리그 선수이면 우리는 마이너리그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력으로 하자면 우리가 이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자신감과 투지와 애국심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져도 별로 창피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미국은 우리에게 지면 창피한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 선수들은 얼마든지 편안하게 경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선수들 가운데 최희섭선수는 체격이 메이저리그 급이지만 그 외에는 다 왜소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잘 던지고 잘 쳤습니다. 미국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최대의 수확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선수, 연봉이 많은 선수, 실력이 좋은 선수라고 하더라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새삼 배웠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하나님보다 사람에 집중되면 공동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모세가 사람들을 재판하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한히 하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를 제쳐놓고 사람을 구제하다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잡혀갔을 때에 공회원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섬기라는 말이 가장 큰 유혹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최대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열등감은 즉시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양식을 의존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기근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 때 사람을 보니 겁이 나고, 열등의식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니 바로가 그렇게 크게 보였습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그를 율법의 대표자로 말합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와 대결하여 여호와가 하나님을 증명하고 승리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승리 후에 심리적 패배를 경험합니다. 열등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 때문에 완전히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께 “나만 남았사오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겁날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열등감 때문에 한 여인에게 완전히 패배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물 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물결을 더 커 보이니 물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니 한 여종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후에 완전히 좌절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달란트비유를 보시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주인에게 변명하고 장사하지 못하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니 열등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주인의 입장과 주인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상대빈곤과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교의식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열등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안에 있으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3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칩니까? 얼마나 위풍당당합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자세입니다. 세상의 작은 자이지만, 아무 것도 아닌 자이지만 이래 뵈도 하늘나라의 주인입니다. 이런 자신감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고린도전서 1:27에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합니다. 미련하지만, 약하지만 그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미련한 것이나 약한 것이 우리의 열등감을 유발하지는 못합니다.

  열등감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자들은 성숙한 인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라, 개인 차이 인정하라, 자기를 용납하고 공유하는 마음 가지라”고 합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모르면 더 열등감이 생기겠지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열등감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선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자존감을 가지게 되고 알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맞는 최고의 달란트를 다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자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지식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힘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미남입니다. 내가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열등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엘리노어 루즈벨트는 “당신의 동의가 없는 한 아무도 당신이 열등하다고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은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자신감이 되고, 성공의 요인이 된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기에 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존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조류학자 아모츠 자하비는 1970년대에 ‘장애 원리’(handicap principle)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이론은 많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즉 ‘장애가 있기 때문에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위험 때문에 살아남는다는 것이 장애 원리입니다. 병 때문에 더 오래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일찍 죽습니다. 당뇨병은 알고 관리하면 훨씬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합니다. 장애나 병이나 열등한 것을 극복하면 그 자체가 성공인 것입니다.

  삼중고를 극복하고 성공한 헬렌 켈러,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의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나 복음성가가수가 된 레나 마리아, 말아톤의 배형진, 그리고 수영의 말아톤이라고 하는 김진호,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실로암 병원의 김선태 목사님 등 장애 때문 성공한 사례는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디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개와 달리기해서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개와 달리기해서 이기면 개보다 더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개하고 달리기해서 지면 개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개하고 달리기해서 비기면 개 같은 인간이랍니다. 인간이 무엇과 비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만드신 너무나 고귀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상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시드로 박스터는 “내 마음이 깨어 있을 때”라는 그의 책에서 “장애물과 기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라고 합니다. “이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 태도는 열등감을 극복하는 밑천입니다.

결론

  스코틀랜드의 격언 가운데는 “그는 놋쇠 목을 가졌다”(He has a brass neck)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너무 커서 기꺼이 자기 목을 내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너무 지나친 자신감도 교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놋쇠 목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신감을 상실하고 열등감이 충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지나친 열등감도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 무엇인지 아세요? 트레이닝복 패션입니다. 도무지 상상 못할 패션이 등장했습니다. 트레이닝복이야 운동할 때나 입고 집에서나 입는 것인데 이제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회사에 출근도 하고 외출도 합니다. 아마 교회도 곧 트레이닝복 패션이 등장할 것입니다. 자신의 개성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대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열등의식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열등감은 사탄에게 속게 합니다. 받은 것보다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열등감, 불평, 원망은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열등감 투성이입니다. 천사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다가 타락하여 추방당하였습니다. 사탄이 하와를 공격할 때 한 말을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꼬입니다. 이런 열등감을 이용하는 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99마리 양이 아니라 모자란 한 마리 양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I can”은 “나는 할 수 있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I can”은 “나는 깡통이다”라고 합니다. “할 수 있다”와 “깡통이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열등감이 축복으로 바뀌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신만만, 위풍당당하게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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