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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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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동차라면 사족을 못쓴다. 자동차를 사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타느냐가 중요한 것인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 같은 시골 서민이 방탄차를 타고 다닌다면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를 방문한 부시나 노무현 대통령이 방탄차를 타고 아군 부대를 시찰한다면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야 변호사 시절에 무엇을 타고 다니든 어떠하겠는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방탄차를 타야 한다. 테러를 당하면 국가의 망신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타느냐 하는 것은 자기의 직임과 사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도 타야할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탈 것은 나귀 새끼였다. 사람이라곤 태워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에게 탈 것이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탈 것이라면 예수님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루에 천리를 다니는 힘을 지닌 천리마 같은 힘센 말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품위와 기품으로 다듬어진 기름진 백마를 타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왜, 나귀 새끼였나?
1. 왕이 오신다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해야하기 때문이다. (슥9:9)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시고 그 나귀 새끼를 탄 것은 왕으로 오시는 이, 그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오시는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오시는 예수님이 왕인지, 왕이 아닌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어렸을 적 애굽으로 피난을 가고 하는 이러한 예언이 성취될 수 있는 확률은 텍사스 주에 60cm 동전을 던지고 단 하나의 표시된 동전을 찾는데 그것을 눈을 가리고 찾아내는 확률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이 아무리 희박해도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나귀를 타면 되는 것이다. 남북한 인구 6천만명 가운데 무작위로 나를 찾는다면 찾기 어렵다. 그러나 미리 주어진 약속이 지켜지고 있으면 쉬워진다. 내가 여의도 광장에 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자전거를 타고 활보하건만 나만은 세발 자전거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세발 자전거 위에는 겉옷을 벗어서 걸쳐놓고 양복을 입은 어른이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오목천에 사는 김철한이라 하면 누가 누구인지 몰라도 확실히 세발 자전거 타고 있는 어른은 김철한이다. 의심할 것도 없다. 나를 찾으려는 자는 주저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도 나귀 새끼를 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왕이 오신다는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내가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귀를 타야 한다.

2. 오시는 왕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슥9:9)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를 타는 이유는 나귀의 모습처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계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힘을 남용하는 불의와 왕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피흘리는 왕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권세로 인해 지존이 되려고 하는 교만의 왕이 아니란 뜻이다. 말씀 그대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예수님은 공의의 왕임을 나타내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신다. 또,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신 왕이시기에 작은 나귀를 타신다. 나귀를 타야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 자신의 겸손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주님은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다. 주님은 백마를 타고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을 타느냐, 안 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겸손한 모습을 계시하는데 초점을 두신다.

3. 오시는 왕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슥9:10)

슥9:10에는 나귀를 타시는 왕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나귀를 타시는 왕의 역할은 전쟁의 왕이 아니고 평화의 왕이시다. 병거와 말을 끊어버리는 화평의 왕이기에 세상의 군왕과 다를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이 예언하는 평화의 왕이시고 그의 정권이 온세상에 미치게 되는 것은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귀를 타야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총과 칼로 이세상을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저 나사렛 예수는 온세상을 자기 무릎에 꿇게 하셨다. 예수는 십자가 사랑으로 온세상을 정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는 평화의 왕, 사랑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므로 왕으로 오시는 자기 모습과 역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만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나라를 세우신 이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왕이 아님을 보여 주신다.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서 예수님을 보았기에 수만의 인파가 다윗의 자손이여(막11:10)라며 외쳤던 것이다. 사실 제자들의 어머니들도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여 자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민중을 향해 무언으로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예수는 진정한 패러디를 하고 있다. 나는 평화의 왕이지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 명령 앞에서 나귀를 끌어오는 일은 그저 지나가는 사역이 아니었다.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는 구속의 사역이었다. 따라서 주님이 나귀를 탈 수 있도록 한 사람들과 짐승 나귀의 순종은 특별히 주님의 주님 되심에 쓰임받는 사건인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나귀를 끌어 내게로 가져오라는 명령 앞에서 저들은 어떻게 사역하였는가?

첫째,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오는 용기로 일하였다. (막11:4)
제자들은 주님 말씀을 들었다. 벳바게 마을로 가서 일을 시작하였다.
막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라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그것을 풀었다고 쓰여 있다. 남의 집 대문에 묶여 있는 나귀를 푸는 것은 모험이다. 도둑이 될 수도 있고 오해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용기를 주었다.

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이 약속을 신뢰한다면 무엇을 두렵겠는가? 왜 망설이겠는가? 주가 쓰시겠다 하면 나귀를 보내줄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푸는 일을 하는데 용기가 생긴다. 믿어지기에 묶여 있는 나귀를 풀어 끌고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왕으로 계시하려면,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음으로 들어내려면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도전하는 용기로 일해야 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미래가 분명치 않아도 좋다. 믿음으로 도전하고 용기로 순종하면 주님의 주님 되심이 나타나게 된다.

둘째, 주님에게 필요한 것은 빌려드리는 헌신으로 일하였다. (막11:6)
막11:5을 보면 나귀의 매인 것을 푸는 제자들에게 나귀 주인이 묻는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제자들이 주님이 쓰시겠다고 대답하였더니 막11:6에서 이 나귀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다.
나귀란 짐승을 왜 기르는가? 당시에 나귀는 운송수단을 위해 길렀다. 나귀를 키우는 목적은 돈벌이 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선뜻 나귀 주인이라 추측되는 어떤 이가 나귀 새끼를 가져가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나귀 주인은 주님을 면전에서 직접 대면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 나귀를 쓰시도록 빌려주었으니 얼마나 축복의 사람들인가? 나귀 주인은 소중한 재산을 빌려 드린 것이다. 한번도 사용하지 아니한 첫 것을 빌려 드린 것이다. 이 빌려 드림의 용기가 주님이 나귀를 타는 일에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도 구속의 사역에 쓰여지는 자가 되려면 소중한 것을 빌려드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약속의 땅을 매입할 때 중도금을 치르는 일을 위해서 여러 성도들이 산과 땅과 밭과 집을 빌려주었다. 이것이 주님을 왕으로 내세우는 헌신의 사역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나귀를 빌려준 어떤 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내 소유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맡겨드리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나를 주님이 쓰시도록 빌려드리고 싶다 나를 노리개로 쓰시듯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상관없이 머슴으로 사용하시든지 식모로 사용해도 상관없이 빌려드리고 싶다. 마른 막대기도 명인의 손에 잡히면 멋지게 되듯 악기가 명인의 손에 잡히면 위대한 소리를 낸다. 우리 인생도 주님에게 빌려 드리면 창조자의 권능에 잡힌 삶을 만들 수 있다. 우리 모두 빌려드리자. 빌려 드리는 헌신을 하자. 기적이 일어난다.

셋째, 겸손히, 공손히 걸어나가는 절제로 일하였다. (막11:7)
막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예수께서 타시니..."
나귀 새끼는 예수님을 태웠다. 비록 연약한 새끼이지만 자기의 허리를 주님께 드렸다.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나아갈 때 나귀는 공손히 걸었다. 까불지도 않았다. 절제된 모습으로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바쳤고 다른 이들은 밭에서 밴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소리 지르고 호산나 찬송하였다. 이때 나귀는 흥분할 수 있었다.

보라, 나귀 새끼는 어떤 짐승인가? 새끼이기에 짐을 지는 일에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이다. 주님을 태우고 모시는 일을 잘못할 수도 있다. 나귀 새끼는 집나귀이기는 하지만 들나귀와 다른 바 없다.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39:7∼8을 보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의 특징은 어거, 즉 콘트롤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귀를 길들이려 소리를 질러대도 들나귀는 제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허리를 드려 주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 새끼는 참으로 놀라운 짐승이다. 주님을 태우지 않고 갈 수도 있다. 궁둥이를 낮추고 앞발을 높이 들어 주님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 붙잡힌 듯 겸손히, 공손하게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나귀를 타야 하는 예수님! 그 구속의 일에 참여한 사람과 짐승은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순종하였다. 마을로 가고 풀고 빌려주고 공손히 태우는 자기 역할을 다하였다. 오직 주님에게 순종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우리 모두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것을 잘 참고 감당하자. 주님이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선 주님을 태워야 한다. 주님을 태우는 우리 교회가 말씀을 신뢰하는데서부터 도전하는 용기로 일하자. 주님에게 필요한 것을 빌려드리는 헌신으로 일하자. 겸손히, 공손히 걸어나가는 절제로 일하자. 용기, 헌신, 절제를 지닌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사역의 주인공이 된다. 길이 길이 빛나는 사람들이 된다. 전혀 뜻밖의 영광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종려주일 아침에 우리는 쓰임받는 사람들과 나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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