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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 (시 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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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인 시편 138편부터  145편까지 여덟 편은 모두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이 시들은 감사와 간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지은 시들이 많습니다. 시편의 반이 다윗이 지은 시들입니다.
그래도 다윗이 지은 시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경우, 더구나 같은 주제를 가진 시들이 이와 같이 여러 편 연결되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시편 138편 3절에서 다윗은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는 주님께서 나의 기도에 그날로, 즉시로 응답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무엇이라고 기도하였을까요?
무엇이라고 기도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그 날로 응답하셨을까요?
3절 뒷부분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내 영혼에 힘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분명합니다.

6절과 7절을 보면 다윗은 이때 무엇인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에게 둘러싸이고,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이 분노하여 다윗을 공격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4절에 “세상의 모든 왕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다른 나라 왕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윗은 몸도 지쳤지만 그의 영혼이 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께 대한 신뢰, 기도, 이런 것이 희미해졌습니다.
다윗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하나님, 내 영혼에 힘을 주소서!’ 간구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빠지고 그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신세가 된 삼손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7: 28)라고 부르짖은 것  처럼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남선교회 월례조찬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은 임형준 목사님이 삼손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해서 ‘영적인 힘을 회복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삼손이 그렇게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도 영적인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삼손은 육신적인 힘을 구하였는데 다윗은 영혼에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다윗의 영혼에 힘을 주어 다윗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생활을 하다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데 우선순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응답의 우선순위가 좀 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인데 주기도문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는 좀 뒤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남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먼저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신앙의 이웃들에게 ‘나의 이런 문제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먼저 응답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응답의 우선순위가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 내 영혼에 힘을 주소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이 기도를 빠르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 내 영혼에 힘을 주소서!’ 기도하고 응답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지금 매우 곤비한 가운데 있습니까?
시편 42편과 43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사순절특별새벽기도회에서 살핀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은 시편 42편 5절에도 나오고 11절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시편 43편 5절에도 다시 한 번 나옵니다.
우리의 영혼이 힘을 잃고 불안해할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실 것입니다.
그 도우심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입니다.(시 107: 9)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내 영혼에 힘을 주소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아주 상식적인 것들이지만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사람은 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몸만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주 천박한 삶입니다.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아니 짐승보다 못한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짐승보다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영혼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영혼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다가 우리가 죽으면 그 때부터 비로소 영혼이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내가 이유 없이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 영혼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육신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 근교 가든 그로브라는 곳에 크리스털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분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분이 쓴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나온 지 삼십여 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이 분이 한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당신은 숨 쉴 공기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
세 가지 요구조건이 만족되지 않을 때 당신의 육신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중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간절히 요구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다.
만일 당신이 살아 있는 영혼, 성장하는 영혼, 정열적이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영혼, 낙관적이고 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살아 있는 육신이 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기나 물이나 음식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 내부에 진정한 힘과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영이다.

그렇습니다. 육신적인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일입니다.
순교자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은 있다, 그 영혼은 지금도 나와 함께 있다, 그 영혼은 육신보다 중요하다, 이것을 믿고 영혼에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지면 많은 경우 육신도 힘을 얻게 됩니다.
또 육신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이, 육신이 약한 것이, 나에게 있어서 약점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병이 깊어 이 목사님은 이제 기력을 거의 잃었습니다.
문병을 갔더니 사모님이 목사님이 어제 밤에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간병을 하다가 지쳐서 깜빡 졸고 있는데 목사님이 발끝으로 자기를 톡톡 치더랍니다.
사모님을 부르고 싶은데 온몸이 힘을 잃고 말은 잘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사모님이 목사님 입에 귀를 대니까 목사님이 모기만한 소리로 ‘여보,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 준비 좀 해야 하겠어!’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 옆에서 사모님과 제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면서 목사님이 웃으시는데 얼굴에 가득한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육신은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졌지만 영은 그와 반비례해서 한없이 맑아지고, 순수해지고, 강해지고, 이제 곧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쁨에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제가 문병 다녀온 다음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육신은 연약하더라도 영혼이 강건한 것이, 영혼은 약하고 육신만 강건한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영혼이 약하고 육신은 강할 때는 그 힘을 잘못 사용하다가 불행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골리앗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도 힘을 주실 것을 구해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장 14절 이하에서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은 ‘나는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오니

그 다음에 바울은 무엇을 제일 먼저 구했습니까?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제일 먼저 구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계시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져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져야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져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릇이 튼튼해야 무엇을 안심하고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치과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임플란트, 치아이식수술을 권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치아를 이식하기 위해서는 잇몸 뼈, 치조골(齒槽骨)이 튼튼해야 한다고 합니다.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해지는 것이 이 잇몸 뼈가 튼튼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제주도에 정전이 되어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들이 멈추고, 교통신호등들이 다 꺼져 대혼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비행기도 착륙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전자장비가 발달해도 마지막에는 육안으로 공항을 찾고, 활주로를 확인하고 착륙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서 전기료를 제일 많이 내고 있는 기관이 바로 제주국제공항입니다.
등대에 불이 꺼지면 배들이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잠언서 20장 27절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이 불이 밝아야 우리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힘을 얻는다는 것은 이 불이 밝아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 등불의 스위치가 아예 꺼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상태를 찬송가 256장은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힘을 얻어 여호와의 등불이 밝아져서 바른 길을 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우리의 길에 빛이 되시는 말씀을 힘써 전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힘을 얻어, 여호와의 등불이 그의 심령에 밝아져서, 그가 바른 길을 가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고 생명의 말씀을 밝히게 되기를 바란다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과 16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여 함이라

오늘 우리는 찬송가 48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엘리자 에드문드 히윗(Miss Eliza Edmunds Hewitt 1851~1920)라는 분입니다.
이 분은 사범학교를 수석으로 나와 교직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학교에서도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평생 미혼으로 보내면서 고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이 분이 36세 때 학교에서 문제 학생을 상담하다가 그 학생으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히윗 선생은 등뼈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석고 붕대를 감고 반년 이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히윗 선생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실의에 빠졌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식물인간 아닌 식물인간 생활을 하자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어느 봄날, 히윗 선생은 의사의 허락을 받아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에 나갔습니다.
따뜻한 봄 햇살을 온몸에 받을 때 그는 자기의 영혼에 의의 태양인 예수님의 빛이 그 이상으로 따뜻하게 비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작사한 것이 찬송가 488장입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내 영혼에 주님의 햇빛이 비치면 내 영혼이 힘을 얻습니다.
겨우내 집안에 있던 화초들을 밖에 내놓아 햇볕을 받게 하면 그 화초가 힘을 얻고 싱싱해집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내 영혼에 노래가 있어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희락과 소망과 복을 받게 됩니다.

히윗 선생은 이 체험 뒤에 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이 분이 작사한 찬송이 여섯 개가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서 봉헌할 때마다 부르던 찬송 362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맘을 나에게 다 바치어라”도 이 분이 작사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도 이 분이 작사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힘을 주시면,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만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제일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셨습니다.
타락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사랑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얼마 전부터 일부 여성 신학자들은 이 이름에 반발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전해 듣기만하다가 실제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어머니여’ 이렇게 하는 분을 실제로 대하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뭐, 그렇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남성우월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그 칭호가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때로는 “아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아람말입니다. 히브리말로 아버지는 ‘아브,’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아람말, 히브리말, 한국말이 음이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임이라”(출15: 2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라파’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이 되십니다.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출17: 15)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쓴 글을 읽었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목적이 없고, 소망이 없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없고, 우리는 본받을 스승이 없고, 보고 따를 깃발이 없습니다.’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보고 따를 깃발이 없기는 왜 없어? 여호와 닛시,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살롬’이라고 합니다(삿6: 24)

이런 이름들은 다 구체적인 체험 다음에 나온 것들입니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하나님이 제물로 쓸 숫양을 준비하신 것을 보고 지은 이름입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이름은 여호수아가 아말렉 사람들을 무찌른 다음에 모세가 붙인 이름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도움의 돌’이라는 뜻인데 풀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8: 12)는 뜻이 됩니다.
사무엘이  블레셋 사람들을 싸우는데 하나님이 우레를 발해서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긴 다음에 사무엘이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분도 빠짐없이 나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특별히 지금 다윗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까?
나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강해져서 그 어려움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시편 23편, 우리 모두 좋아하는 이 시편은 시작 부분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도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에 하나를 더 하기 원합니다.
어떤 이름일까요?
바로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나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4월 첫째 주일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4월을 ‘영력충전(靈力充塡)의 달’로 정했습니다.
‘충전’은 ‘가득 찬다.’는 뜻입니다.
부활절이 들어 있는 달은 자동적으로 ‘부활의 달,’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부활신앙을 가지고  영적인 힘,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주시는 힘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정했습니다. 
4월에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힘을 주셔서 성도 여러분에게 영적인 힘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당회․구역회  회의자료」에 있는 ‘2006년 행사 계획표’에는 ‘영력충전의 달’이 ‘영력충천의 달’로 잘못 나왔습니다.
오자가 생겼습니다.
오자가 난 것은 잘못된 일인데 가만히 보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충천(衝天)’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오름’  ‘어떤 느낌이 북받치어 오름’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강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가득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르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성전 미문에 앉았던 나면서 못 걷게 되었다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 받은 사람처럼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의 영혼에 힘을 주소서!’ 기도하고, 응답 받고, 그것도 빠르게 응답 받고, 다윗과 같이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노래하며 영력이 충전해져서 하나님을 ‘나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부르는 가운데 이기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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