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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속의 빛은 밝은가? (눅 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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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두운 곳을 어떤 사나이가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소경이 등불을 들고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이는,
“당신은 보아 하니 소경인데 어째서 등불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은
“내가 이것을 들고 걷고 있으면 내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을 눈뜬 사람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늘상 다니던 길이라 해도 어둠이 깔리고 나면 마음놓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 길을 잘 안다고 해도 혹 길에 나 모르게 놓인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모르기에 더더욱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 어둡게 되면 가로등을 밝힙니다. 지금이야 전기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등을 켜고 밤길을 걷거나 아니면 홰를 밝혀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둡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그런 때는 작은 빛도 아쉽습니다. 달빛조차 없는 그런 날 더욱 빛은 그립습니다. 거기다가 구름까지 끼어 달빛조차 없다면 그 밤의 어두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어두운 때 등불을 켜서 어디다 두어야 되겠습니까?

옛날 어떤 의사가 한밤중에 13㎞나 떨어진 먼 시골로 중환자를 왕진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가는 길목의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집에다 전화를 걸어 창문에 등불을 켜 둘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다 전화를 해서 역시 창문에 등불을 켜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환자의 집에 이르는 동안 모든 길목의 집들이 창문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의사는 쏟아지는 폭설과 어둠을 뚫고 길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도와주는 길목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먼저 등불을 켜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해가 지고 이윽고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면 그 밝히 보이던 부분들이 어둠에 잠겨 듭니다. 그러면 늘상 다니던 길인데도 어둠 속에서 걸을라치면 그렇게 조심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서 넘어지고 여기저기 부딪치고 해서 꼴이 말이 아니게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두움을 밝혀줄 도구를 찾습니다. 지금 같으면 웬만한 곳에는 다 가로등이 밝혀져 있고 그렇지 않다면 손전등이라도 들고 나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옛날에는 등불을 켜거나 아니면 횃불을 들고 나다녔습니다. 또 대갓집 같으면 문 앞에 등을 켜서 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이는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서 뿐 아니라 지나다니는 동리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 켭니다. 불을 켜서 어두움을 밝히게 되면 어두워서 못 보던 부분을 내가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그 빛을 통해 볼 수 없었던 부분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은 필요합니다. 요즈음은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예전에는 전기가 툭하면 나갑니다. 그러면 세상에 내가 사는 집인데도 물건 하나 찾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래서 촛불 하나라도 켜 놓지를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서 등불을 켠다고 할 때 누구라도 마땅히 조금이라도 더 어두움을 밝혀줄 수 있는 그런 곳에다가 올려놓거나 매달아 놓을 것입니다. 등불을 켜기는 했는데 이를 움 속이나 됫박 속에다가 숨겨 놓는다면 그 등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저 사람 미친 사람 아냐?” 하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것입니다. 물론 전쟁터라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래서 적에게 나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도록 단속을 하고 조심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등불을 켜서는 이를 다시 숨길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됫박 아래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다가 놓아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만 빛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즉 내 집에 들어오는 사람 역시도 이 빛이 있음으로 해서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렇게 마태복음 5장 14절로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 보여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존재요 본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본이 되어야 합니까?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착한 행실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 내 보이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누구라도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삶을 사는 “역시 저 사람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드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느 이름 모를 선생님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우리 반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서 그림자에 대해 수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여러 가지 그림자 모양을 만들던 중에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그림자를 주셨을까?”
그림자에 대한 수업을 다 마치고 학생들을 보낸 뒤에도 그 질문은 계속 내 마음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잠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림자는 바로 너희들의 죄다. 내가 그림자를 너희 몸에 붙여둔 이유는 그 그림자를 보면서 너희들이 죄인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 시커먼 그림자, 그것은 바로 나의 검디 검은 죄였던 것입니다. 영원한 빛 되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사람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날이 흐리고 어두우면 우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그림자가 가장 짧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실 때 우리 죄에 대한 부담감도 가장 적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그림자 같은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눈은 보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지만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한다면 그 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어두워지는 눈으로 인해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문이라도 볼라치면 손을 멀리 내 뻗어야 됩니다. 작은 글씨라도 읽을라치면 눈을 잔뜩 찌푸리고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노안은 나은 겁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돋보기를 낀다든가 하면 잘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눈이 침침해진다고 하죠? 눈에 어떤 병이 오게 되면 사물이 아주 뿌옇게 보이다가 이윽고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 산다고 하는 것이 불편한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 외에도 영의 눈이 있고 또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먼저 영의 눈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위 영안이 열려야 된다는 말을 들어 보셨을 줄 압니다. 영안이 열리면 뭐 신비한 어떤 것을 보게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님을 바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소위 믿음의 눈입니다.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주님을 깨닫고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오랜 세월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내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주님을 마음에 모시기는 했는데 그 주님이 언제 어디서건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잊고 있다면 이 역시 불행한 일입니다. 왜 우리가 때때로 염려하고 좌절합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주를 믿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때 더 담대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더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의 눈이 열려져 있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아울러 우리 마음의 눈은 또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 양심이 어두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화인 맞은 자처럼 죽어 있는 양심은 아닙니까? 소위 시커먼 양심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어둡게 보입니다. 아니 어두운 것을 보아도 그것이 어두운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잘못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압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요즘 세대를 가리켜서 공경할 줄 모르는 세대라고 합니다. 그저 자기 생각만 옳습니다. 내 생각하고 다르면 그건 적대시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생각이 고루하다고 젊은이들은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또 젊은이들 아주 버릇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살아온 세대가 다르다보니 환경이 다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른들 앞에서는 감히 나서서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대꾸한다고 불호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할말은 다 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말을 다하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방을 아주 무시해버리더란 말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할 줄을 모릅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 둘만 낳아서 내 자식만 귀하게 키우려고 내 자식 기 안 죽이려고 그렇게 가르치다보니 나 혼자서는 잘났는지 몰라도 남을 배려하는 수준에서는 전부 낙제점입니다. 이제는 어른도 없고 스승도 없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켜보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양심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에게 비쳐올 때에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먼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 목숨까지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아니 어두움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그 어두움으로부터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주님의 거룩한 백성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도록 그렇게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영의 눈이 그리고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있는 그런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밤에도 태양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달이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을 낸다고 하니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달빛이 아니라 태양 빛인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달을 통해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달이 자신의 위치에서 달로서 존재하지 않고 온 우주를 떠다닌다면, 우리의 밤은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믿는 자들로서 존재할 때, 세상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빛을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을 받아들여 그 빛을 반사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나게 됩니다. 담배를 피울 때 나는 빛이 어두운 밤에는 자그마치 10km밖에서도 보인다고 합니다. 그만큼 어두움 속에 비쳐지는 빛의 위력은 아주 큽니다. 지금 세상이 어둡다고요?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밝게 빛나야 합니다. 모두가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가득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 넣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내 마음 가득히 채워질 수 있도록 그렇게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깊이를 알고 깨달은 바 은혜를 따라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빛이 더욱 밝게 비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펼치십시다. 그래서 여러분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포근하게 잡아주는 사랑의 손길로 인해 죽어가던 사람, 삶의 소망을 다 잃어버린 사람, 어두움 속에 방황하던 영혼들이 주 앞으로 나오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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