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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천합시다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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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란? 누가복음의 기자가 '서기관'을 지칭하며 쓴 말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에 의해 불의한 자는 버림을 받고, 의로운 자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마지막 날에 의로운 이들의 부활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인 용어입니다.

여기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그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로 하는 율법교사와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온 그리스도 사이에 나오는 문답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율법학자로서 그것을 모른다면 이상한 말입니다. 그 사람은 밤낮 교회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그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어떻게 배웠느냐? 어떻게 또 네가 가르치느냐?'라고 물으니까 그때에 사람이 얘기하기를 "네 마음 네 몸 네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 하기를 자기의 몸같이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잘 알고 있구나! 네 말은 옳다. 내가 거기에다가 더 해 줄 말이 없다. 문제는 네가 말 그대로 행하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학자와 예수와의 사이에는 완전히 동일한 것이 '영생의 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예수의 복음도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그가 그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다는 것은 그가 진정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그는 자신의 율법지식과 그 완벽한 실천에 대해 자신에 넘쳐있었으며,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바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어떤 율법사에게 영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도 불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영생의 도리를 배우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미스바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첫번째 영생에 대한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살펴봅시다.(25-27절)

어느 날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을 가리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대개 '바리새파'에 속한 '성서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베껴 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서기관'들은 산헤드린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들의 성서 해석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랍비(선생)"이라 불리웠으며, 이렇게 랍비로 불리우는 것을 최대의 명예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 자기들은 지키지 않으며, 백성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눅11:46)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마23:2)

그러나 반면에 영생에 문제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요3:1)나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행5:34) 같은 진실하고 좋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 온 율법사는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였습니다. 영생을 얻는 문제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영생을 갈망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과의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영생을 갈망하게 된 이유는 본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범죄 하므로 영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랍비라 지칭되는 자로서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게된 것은 본문 23절에 "예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어느 정도로 정통하고 있는지를 시험, Test를 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공동 번역 성경’에는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했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사는 은근히 자기의 성경 실력을 과시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은밀히 자기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에 은밀히 찾아와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율법사도 이 영생의 문제를 질문함으로서 은밀히 자기의 내면에 해결하지 못했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서기관으로서 성경에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의 완벽한 지식과 이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영생에 대한 확신도 영생을 얻은 자의 기쁨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분명히 율법을 다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다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확신이 없는 영생 문제를 확신 있게 가르쳐야 할 때는 양심이 더욱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예수님께 묻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6절에는 오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인데 "내가 무슨 선(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한 것을 봅니다. 이 율법사는 무엇을 하여야(to do),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그 공덕으로 영생을 얻을게 아닌가? 즉. 행함으로서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율법교사에게 되물으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하셨습니다.

그가 율법의 전문가로서 율법을 다 알고 있는 줄로 여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그가 알기만 하지 실천하지는 않고 있음을 깨우쳐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율법교사는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 하였다는 신명기 6:5절에 기록된 말씀을 생각하며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얼른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과연 서기관다운 명 대답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알기는 아는구나. 그런데 알았으면 행하라. 행하지는 않고 영생을 얻을 생각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 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2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do this and you live)."는 말씀을 볼 때, 이 서기관의 신앙 문제는 행함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열심히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11:46)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신앙이 좋은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의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행하고자 ㄴ력하면 할 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며, 실천하지 모샇는 나약한 존재요. 그 결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인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어야 영생을 얻게 됨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2. 두 번 째 영생과 행함의 문제에 대하여 살펴봅시다(29-37절).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영생하리라."고 가르쳐 주시니 율법사는 율법을 다 지키기 싫고, 지키지 않았음이 드러났으므로 화제를 다른 곳에 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오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누가 나의 진정한 이웃이 되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체로 말씀에 순종심이 없는 자가 말이 많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율법교사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9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여쭙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했다는 것입니다(29절). 그 율법교사는 이제 자기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생을 소유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그 부끄러움을 피해보려고 우물거리며, 말하기를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랬다는 듯이 변명을 한 것입니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했으면 됐지. 더 사랑해야 할 이웃이 또 어디 있다는 것입니까?" 하는 항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누구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해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율법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갈3:12) 그러나 이 율법사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속에 영생에 대한 확신도 기쁨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한,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나는 내 배고프면 먹고, 내가 잠을 자고 싶으면 자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체력이 약하면 보약을 사 먹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한 몸이라고 하는 아내에게도 자기 몸과 같이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어떻게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지키거나, 지킬 수 없으니 안 지켜도 되는 말씀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합니다. 의롭고 선합니다.(롬7:12)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말씀을 어겨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호리라도 죄가 있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마5:26)

그러면 예수님은 왜 행할 수도 없는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고 하십니까? 이게 바로 시집을 가 봐야 어미 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설명해도, 가르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투쟁하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다.’는 것과 ‘선한 행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치면 칠수록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 밖에는 달리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인 본문을 다시 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2,600피트의 높이에 위치한 도시이고,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17마일 떨어진 도시로서 해면보다 825피트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425피트(1000미터 이상)의 높낮이 차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여리고로 가는 길은 비탈지고 구불구불한 길입니다.

제가 여리고 지역에 가보았더니 그 길은 광야와 바위가 많은 지역을 통과하는 위험한 길이었으며, 사방에 동굴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님 당시 이전부터 이후까지 오랫동안 강도들이 은신하여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강도들은 지나가던 한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채로 그를 버리고 갔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직무를 마치고 가지 집으로 내려가고 있어는 지도 모릅니다.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 제사장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 제사장이 왜 그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귀족들 이었습니다. 또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는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틀림없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가 왜 피하여 지나갔겠습니까? 그는 아마도 그 사람이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사장들은 자기 직무를 수행 할 수 없고,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하고, 희생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그 제사장 심중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하다는 말씀이 내적으로 싸우다가 이 영적인 갈등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편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갑니다.

제사장이 외면하고 지나간 후 또 레위인 하나도 그와 같이 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조금 덜 중요하지만 제사장을 도와 성전 일을 돌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간 다음 또 누가 왔습니까?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았습니다.(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아마 그는 제사장보다 더 가까이 그 사람이 누워 있는 그 장소에까지 와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대게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예배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백성을 섬기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명령했습니다.(민18:21-24).

그러므로 이들은 백성들을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강도만난 사람을 오히려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알기는 알되 행함이 없는 서기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시면서 질문한 서기관(율법사) 너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율법을 잘 아는 성직자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지나간 후에 또 누가 왔습니까?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던 중 거기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벨론 포로 시절 남은 백성과 이곳에 이주해 온 이방 백성과 혼인을 하므로 피를 더럽혔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개 취급을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 문화를 받아 드리고 거기 물들었다고 멸시를 하고 상종치도 않았습니다.(요4:9)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도 올라가지 못하여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짖고 거기서 예배했습니다.(요4:4-9)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33-35절을 보십시오.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으며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여 선을 베푼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다 착하고 유대인은 다 나쁘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점은 '혈통과 출신과 직업에 상관없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힘썼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셔서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비시키신 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대비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대비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그가 대답하기를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고 하셨습니다(37절).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요점은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전반부의 결론부분인 28절을 보아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고, 후반부의 결론부분인 37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3.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실천해야 하는 신앙"을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1) 우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은 한 인격적 존재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가리키려고 한 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지, 정, 의에 신체적 힘이나 물리적 능력까지도 다 포함하여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힘은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다면 참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목숨까지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의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변하는 것입니다.

2) 이웃 사랑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여기서 "네 자신 같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법입니다. 이웃사랑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한다 하면서 물질적으로는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 하고 실천이 없다면 그것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대고 부추겨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동등한 자세로 내려와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싸매주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코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이 아닌, 동등 된 자세로 말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생들과 동등하게 여김을 받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좀 더 자세히 구경을 하거나 죽음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 할 일이 없는가? 있다면 무엇인가를 살핀 것입니다.

그에게는 위기에 처한 이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이 아직 죽지 않고 있음을 알았고, 빨리 손을 쓰면 살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살려보려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해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핀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포도주는 종종 소독제나 방부제의 역할을 했습니다. 기름은 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은 후 다친 데를 싸맴으로써 우선 할 수 있는 모든 응급조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가 출현한 곳에서 빨리 피하지 않고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강도를 만날 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 다친 사람을 내버려두고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돌본 것입니다.

그는 말이었는지 나귀였는지는 모르나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타던 짐승에 그 다친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었습니다. 이것은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의 상징입니다. 말을 타고 편안히 갈 수 있지만 그 약한 자, 즉 장애인이든지 지극히 작은 자이든지를 섬기기 위해 그는 험한 산길을 걸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주막에 데려다 놓기만 하고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곁에서 하룻밤을 자며 그를 돌보아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당부한 것입니다.

두 데나리온은 두 주간의 기본적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동정하고 생각으로는 인정한다 해도 나의 물질을 나눌 수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인간의 감정과 동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여비를 다 털어서 치료비로 내놓은 듯합니다. 데나리온 둘은 결코 큰돈은 아닐 것입니다. 약 10만원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그정도의 여비를 가지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비가 더 든다면 그가 돌아올 때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만들어 올 것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결코 부유한 가운데서 물질을 쓰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풍족한 가운데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그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고 말함으로써 혹시 주막주인이 치료비 나갈 것을 염려하느라 환자를 소홀히 돌보게 되지 않도록 그를 안심시키는 세심한 배려까지 한 것입니다. 그는 그가 갖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와 나귀와 돈과 시간까지 다 들여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준 것입니다.

그야말로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할 뿐 아니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셨는데, "뜻"이라는 말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사고와 계획하는 능력까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하고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세심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한 것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뜻을 다하여" 불쌍한 사람을 도운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참된 사랑의 실천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전도가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란 단지 율법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가 내 이웃인가?" 묻기보다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를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본문 29절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36-37절에서 다시 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누가 그의 이웃인지를 답해주시지 않고, 그가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것인지를 되묻고 가르쳐 주셨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일생동안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이기적인 물음을 물으며, 사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그 누구에게라도 한 번이나 제대로 사랑의 이웃이 되어준 적이 있는가?" 자신에게 냉철하게 물으며, 누구에게든 지금 나의 사랑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안점은 '하나님 사랑과 누구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답을 가장 완벽하게 가르쳐주시고, 실천하여 보여주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그의 비유 그대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특별히 사순절의 고난을 자원하여 선택하시고, 십자가의 죽어주심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을 이루는 방법이기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대로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절기 기간입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의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그렇게 사랑했는지를 곰곰이 되돌아보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 고간을 받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그동안 실천하지 못한 사랑의 부채를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성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받는 단계요, 다음은 소유하는 단계요, 마지막은 받은 것을 주는 단계입니다. 자연의 모든 것도 때가 되면 다시 되돌려 주게 됩니다.

잠언 3장 27절 말씀과 같이 "우리의 손에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카네기는 '나는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과 축복으로 남에게 어떤 선을 행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때문에 해가 질 때가 되거든 우리가 쥐고 가려고 하지 말고, 불쌍한 이웃과 사회를 향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나타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생활은 율법사처럼, 제사장처럼, 레위인과 같이 영적으로 너무너무 잘하는데 이웃이 없는 사람, 이웃을 모르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를 많이 하고 철저하게 영적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이 없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반쪽 신앙인 것입니다. 고무신 반쪽은 별 가치가 없듯이 하나님 앞에 반쪽 신앙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르침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거나 같은 동네에 살면 '이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귈 때도 조금이라도 지위가 높은 사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보면 그 사람이 출세한 사람인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회적 위치와 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들과의 많은 만남이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과 친구가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은 '부자나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가까이 가셨고, '눈먼 자'의 곁에 계셨고, '간질병자, 문둥병자, 창녀와 세리'를 사랑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예수님은 오히려 "누가 이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이 어떠합니까?

이웃이란? 같은 혈통을 타고난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민족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모두 나의 '이웃'입니다. 나의 이웃된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긍휼을 베풀어서 죽을 자리에서 살려내어야 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여 무엇보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하는 귀한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요.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전도하십시오! 영혼 구원에 총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고 말씀하셨는데, 전도하지 않고 영혼 구원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2: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베드로전서 2:21절에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따르는 사람은 전도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요. 영혼구원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에스겔 3장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 피 값을 우리 손에서 찾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전도할 기회, 눈물 흘려 기도할 기회, 물질로 구령사업에 동참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전도의 사명과 이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작은 항구 밀레도에서 3년이나 눈물로 전도하다가 떠나면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파숫군으로 세움을 받은 성도들은 최선을 다하여 이웃을 전도하고 구령사업에 전력해야 합니다.

1962년 어느날 '빌리 그래함' 목사는 씨애틀의 어느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하나님은 그에게 잠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당시 인기 최고의 여자 배우인 '마를린 먼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여자의 영혼이 급해 나에게 전도시키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급히 먼로양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먼로양의 비서와 연결되었습니다. 먼로양과 통화하고 싶다고 했더니 비서가 거절하였습니다. 먼로양은 지금 침실에 들었고, 먼로양과 통화하려면 예약을 하고 2주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통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서는 끝내 거절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수화기를 놓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도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녀는 그 이튿날 침대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영화배우였지만 저녁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을 잘 수 없어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습관화되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잔 것이 죽음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그 후에 그가 마지막 쓴 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한 여성으로서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아직 건강할 뿐 아니라 매우 아름다우며, 돈도 많이 모았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으며,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습니다.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의 마음은 외롭고 공허하며,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그는 인기도 많으며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한 고독을 느끼며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평안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녀는 평안하지 못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에 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 '조지 삐볼리슈'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올라가도 그의 영적 고갈은 메꿀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그의 마음속에 모셨습니다. 넘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는 오페라 가수 생활을 청산하고 빌리 그래함 전도단을 따라 다니며 찬양하였습니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 102장이었습니다.

♬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 없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과 소망과 행복을 발견하여 자신의 삼ㄹ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복된 삶을 이루어 나간 것입니다.

전도는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고전 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이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득불 전해야 하는 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가든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재산이 몰수되든지 간에 어더한 조치를 국가로 부터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성도로서의 복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갚기위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도는 성도의 의무요. 동시에 상급과 축복된 삶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이 축복된 삶을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그 중에서도 으뜸인 영혼을 건져내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최선을 다합시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힘이 들더라도, 나하고 별로 상관이 없더라도, 물질의 부담이 있더라도 그들을 살려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한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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