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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러셨습니다 (사 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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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는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형집행 직전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세계의 관심입니다. 교회는 핍박의 연속입니다. 고난에서 핀 꽃이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 값으로 성장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목숨도 바쳐야 합니다. “하늘가는 길”의 저자 존 번연은 “십자가의 학교는 빛의 학교다”(The school of the cross is the school of the light)라 했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은 빛의 신학이다”(The theology of cross is the theology of light)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모든 권력자들이 다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더 싫어했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짜라 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짝퉁입니다. 사기꾼이라 했습니다. 이단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있었습니다. 이상한 마력을 지녔다고 보았습니다. 장님을 눈 뜨게 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열 두 바구니를 남게 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게 더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야단이었습니다. 이러다가 이 세상이 예수 청년의 천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싹을 자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증인을 동원했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성경을 잘 몰랐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십자가는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푸대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잘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웠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오셨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초라한 나사렛 목수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세요. 종교는 부패했습니다. 도덕이 타락했습니다. 그리스의 문학이 빛을 잃었습니다. 이미 로마는 늙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은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세우신 선한 계획이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이 복이 있도다.”(계 14:12-13) 참 행복이 무엇입니까? 주님 위해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주님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1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자랑입니다.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잘못된 것입니다.

Ⅰ. 고난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왓슨이란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 두셨습니다. 430년 종살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그들을 연단하심(Probation) ②그들을 깨끗케 하심(Purgation) ③은혜를 더하게 하심(Augmentation)이라 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통한 영광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다 고난을 싫어합니다. 15년 전 한국의 여성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선생, 산업은행 총재가 남편이었던 김옥라 박사 등입니다. 한 때의 영광의 빛이 사라진 때, 우울증에 시달릴 때랍니다. 김옥라 박사가 “우리 이러지 말고 모입시다. 죽음을 겁내지 맙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이야기 하는 멋쟁이 지성인이 될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셨고 김옥라 박사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프거든 절대로 병원 응급실에 넣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도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대학교 병원 대통령 전용 특실에 모시려 했답니다. 본인과 그 자부가 조용히 이화장에서 마지막을 맞도록 해달라 해서 그렇게 했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셨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자랑도 아니었습니다. 한 가문이나 동리에 십자가에서 사형 당한 사람 있으면 대단한 수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가장 슬픈 형틀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눈을 감아 버리신 것입니다. 여기 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소리인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가장 무서울까요? 죽음이랍니다. 다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우리는 병원 영안실 앞을 지나가기 싫어합니다. 한문에 죽을 사(死)자를 씁니다. 발음이 같다고 숫자 사(四)를 싫어합니다. 아파트도 4층이 없는 곳이 많습니다. 엘리베이터도 4층이란 말을 빼 버립니다. 목욕탕 신발장, 옷장도 “4”번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일부러 비워놓은 4번 신발장 번호를 씁니다. 남들은 저를 이상한 눈으로 흘깃흘깃 봅니다. 아마 나이가 지긋해서 젊은이에게 인생 보너스를 양보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요. 우리는 인생이 고난입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날 때 웁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숨 쉬는 시작이지요.

철학자들은 “지금부터 고생의 길”을 간다는 뜻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죽음 싫지요. 그렇습니다. 하루가 1,440분입니다. 우리 나날이 행복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고통을 덜기 위해 아들이 대신 고통의 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크십니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고통이 있기에 사랑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배 아파 낳은 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영화로운 승리로 장식하실 것입니다. 고통의 멍에는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먹고 다시 생각이 안 나도록 했으면 합니다.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고 싶소.”누구의 말일 것 같습니까? 한국 교회의 영웅적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이 마지막 때 한 말씀입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1938년 2월부터 1944년 4월 21일 밤 9시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시기까지 네 차례나 구속되셨습니다. 너무 심한 고문과 감옥생활에 “주님! 이러다가 순교 못할 것 같습니다. 순교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도 정신적 압박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으로 늘 불안해  했습니다. 일본에 굴복할 것 같은 위기를 늘 느끼신 것입니다. 끝내 최후까지 가까스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 때 일본은 기독교 탄압에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사참배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라는 상식 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대표적 인물인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이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 제일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건 아니다.”하며 보수신앙을 지키자고 하며 나간 것이 고신측입니다. 우리 교단도 그 뒤 서문교회 총회에서 “우리의 결정이 잘못 되었습니다. 회개합시다.”라며 회개했습니다. 고난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과 적당하게 어울리는 것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지킨 신앙의 순수성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Ⅱ.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누구나 다 쉽게 살려고 합니다. 요즈음 일도 힘들고 어려운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목사님 꼭 주일 오후, 수요일 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선배들의 목회에 비하면 너무 적당주의자가 된 것 같습니다. 저의 친구는 교역자들 새벽기도 빠지면 불호령을 내지요. 매일 마산에서 대구까지 새벽기도 나오시는 장로님도 계신답니다. 사람 사정을 너무 봐주다 보면 신앙상태가 물러집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배신자 제자들을 향해 서운한 말씀 한 마디 없으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저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터무니없이 예수 청년을 사형에 처하라 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한 적도 없습니다. 누구와 다투신 적도 없습니다. 누구의 미움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다 등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을 시답잖게 보았습니다. 비웃고 침을 뱉었습니다. 욕을 하고 모래를 던졌습니다. 어제 같이 “호산나 호산나”하면서 이 나라의 왕으로 모시려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사람 마음 모르는 것 맞지요. 그 만큼 그는 외톨박이였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버렸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배신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힘드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이것은 영혼과 마음의 아픔입니다. 제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졸았습니다. 몇 시간 전만해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생님이 어려워지자 다 도망갔습니다. 남은 베드로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이해하시겠지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구속의 십자가입니다. 사랑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십자가라 합니다. 기독교는 정말 고난을 통해 태어난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일구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피해 가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문화는 십자가 문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계의 십자가를 모은 분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최대의 자랑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내리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문화의 단비에 젖어 있습니다. 너무 편리하고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릴적 마룻바닥에서 예배드리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섬겼던 부산중앙교회는 70년도 더 전에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이것이 하나의 구경거리였답니다. 또 많은 비난을 받았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감히 의자에 앉아 다리를 비꼬고 예배드리다니.” 그것은 곧 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성경을 누구나 여러 권 갖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성경 한 권이 얼마나 귀했는지 모릅니다. 또 지금은 화면에 찬송가, 성경을 다 비춰줍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 찬송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예전엔 목사가 설교할 때 교인들이 노트나 성경에 메모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별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보나 인터넷 홈페이지에 다 올리기 때문입니다. 편하게 살다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도 잘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나기 쉽다고 합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줄이고자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돌아오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전엔 고난주간에 금식기도를 합니다. 말조심도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합시다. 늘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아들은 우리 죗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그가 찔리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내나 남편 대신에 죽는 사람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죗값이 죽음인 것 아시지요. 그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최고의 선물입니다. 최고의 사랑입니다. 늘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씨앗입니다. 십자가는 영광 이전의 팡파래입니다. 고난은 피해 가는 것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영광이 늘 함께 하셔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6.4.9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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