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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에서 흐르는 능력 (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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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오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장식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걸이, 반지, 넥타이핀, 자동차등 수많은 곳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장 끔찍한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할 때에 로마에 반역하는 이들을 잔인하게 죽이려고 고안하여 낸 사형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사형틀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틀을 오늘 날 교회에 달아 놓습니다. 그리소 사람들이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전기고문대를 달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섬뜻해 할가요?
사람을 죽인 칼을 목에 걸고 다니면 얼마나 소름이 끼칠가요?
십자가 처형은 315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가장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수단으로 십자가가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이 만든 사형방법이 십자가인 데 자기들이 만들고도 자기들이 포기하였습니다. 자기들이 보아도 사람을 죽이기에는 너무나 잔인하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의 뼈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라고 십자가 중심 교리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십자가를 가장 싫어 합니다. 드라큐라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대면 무서워 벌벌 뻘며 도망을 칩니다. 십자가만 보면 갑자기 파김치가 됩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사람들은 누구를 성인이라고 말합니까? 누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까? 삶이 고귀한 사람을 성인이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이 훌륭하여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위대하여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순교자나 소크라테스나 전쟁에서 용감하게 죽은 전사자의 죽음도 위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십자가는 다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다시 음미하여 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일본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도(道)가 많습니다. 차를 마실 때는 차도(茶道)가 있습니다. 바둑을 둘 때에는 기도(旗道)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식도(食道)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능력인가요?

1. 죄를 알게 하는 능력

죄를 알게 하는 것이 무슨 능력일까요? 이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암이면서도 암인 줄 찾지 못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암을 발견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죄인인 데 죄인인 줄 아는 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알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 맑은 물이라 낮에는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고기는 어부가 다가가면 다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고기 잡이는 항상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 비극적이 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같으면 <더럽게 재수없는 밤이다>라고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지치고 허기지고 쓸쓸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다가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를 빌려 수없이 몰려 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닷가가 강론장이었고, 배가 강대상이었습니다. 한 참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에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180기 성막 쎄미나를 할 때 생긴 이야기입니다.
장님 목사님들 27명이 등록하여 공부하셨습니다. 사모님이 옆에 불어 있었기에 장님 가족만 54명이었습니다. 쎄미나 도중에 <5자는 고통의 수>라는 것을 풀었습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수입니다. 솔로몬 행각에는 기둥이 5개 있었습니다. 5자가 나오면 그 주변은 다 고통스럽습니다. 5개 기둥이 있는 그 곳에서 소경, 절뚝발이, 병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끝나고 장님 목사님 사모님이 내게 다가 오더니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소경이라는 말 하지 마세요. 너무 아파해요. 시각 장애인이라고 하셔야 해요>
우리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 상대방에 상당한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 생일이었습니다.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생일인 데 무슨 선물을 하여 줄가?>
남편이 묻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생일에는 아무 것도 말고 두 시간 동안만 내가 무슨 이야기 하던지 대꾸하지 말고 들어만 주는 선물을 주세요. 들으면서 ‘맞아, 옳아, 그렇지’ 이렇게 세 마디로만 대꾸하여 주세요.>
<여보. 그 건 그 것이고 선물을 말해 봐.>
<아니예요. 무슨 이야기하든지 두 시간만 들어 주세요.>
<그렇게 하지.>
남편이 약속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 하든지 두 시간만은 ‘맞아, 옳아, 그렇지’ 세 마디만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두 시간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처음에 기차에서 만났지요?>
<아니지. 뻐스에서 만났지>
<여보 두시간만 맞아, 옳아, 그렇지 하기로 했잖아요.>
<당신 먼저 내게 프로포즈 했지요?>
<아니 당신 먼저 결혼하자고 편지 보냈잖아?>
<여보 두시간만 맞아, 옳아, 그렇지 하기로 했잖아요.>
남편은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 말도 않고 두 시간만 들어 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내가 그 동안 이야기를 죽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들어 주던 남편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내가 그 때 농담으로 한 말 가지고 그렇게 몇 일 씩 잠을 못 잤나?>
<그 때 그런 일 가지고 그렇게 결혼을 후회하였나?>
<그렇게 내가 무심코 한 말이 그토록 가슴을 아프게 하였나?>
남편은 아내의 손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은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나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화인맞은 양심은 조금도 죄를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아들이 너무 방탕하였습니다.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친구와 관계를 끊으면 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잘 되게 하여 보고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 가자 아들은 얌전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게 되고, 친구들을 사귀자 또 방탕을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먹고 죄를 범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아버지는 펑펑 울면서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 밖에서 아버지의 눈물로 뒤범벅이 된 기도를 들으면서 아들은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회개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죄를 볼 줄 알게 하는 것은 능력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제일 잘 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장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온 현상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 하여 난 사람입니다>
죄를 볼 줄아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2. 죄사함의 능력

십자가는 죄를 알게 할 뿐 아니라 죄를 사하여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죄사함을 깨닫게 하고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빌 목사님이 은혜를 이렇게 비유하였습니다.
성적을 나쁘게 받은 자녀가 어머니에게 와서 성적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첫 반응
<기가 막힌다. 밥먹고 무엇 했니?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 왔니?> 호통하는 반응입니다. 자녀는 인과보응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라고 생각하고 잠잠할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
어머니가 한숨을 들이 쉬고 내 쉬며 <다음에 잘 해라>라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이것은 백골난망입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세 번째 반응
어머니가 목을 끌어 안고 <너 무엇을 먹고 싶니? 수고했다. 다음에 잘 하면 된다. 그럴 수도 있지 않니? 미래는 네 것이다> 라고 사랑하여 줍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지는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여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지난 번 미국에 들어 가서 중국에서 나병 환자촌에서 선교하고 있는 김 요석 목사님 간증 테이프를 구하였습니다. 그 테이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북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느 마을에 몰래 예수를 믿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들은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공산 사상에 짙게 염색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당에 고발하였습니다. 온 동네에서 아들이 친 아버지를 고발한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산당은 온 마을 주민에게 교육을 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공개재판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형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벙거지를 씌우고 손을 뒤로 하여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그 앞에서 아들이 고발장을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이들은 공산당을 배반하고 아침마다 미신같은 신에게 기도한 배반자입니다>
  사람들은 억지로 끌려 나와 공개재판을 구경하면서 숙연하여졌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여 죽이는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심정이 얼굴에 역역히 나타났습니다. 공산당들은 이 아이를 영웅으로 치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고 대단히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았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편 이 아이는 영웅이 되었지만 고아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이 아이가 공산사상이 투철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시키고 길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이 국민학교를 들어 갔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싱긋이 웃는 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사형당하신 아버지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자기는 부모님에게 얼마나 죄를 지은 것인지를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자기가 아버지 고발할 때 나이가 들어서야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번민속에 김 요석 목사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버지 어미니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펑펑 울면서 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 할 죄도 용서하시나요?>
김 목사님은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한 죄도 용서하십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위의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자기도 아침마다 기도하고 있고 아들이 자기를 고발할가봐 조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불교에는 죄사함 교리가 없습니다.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피흘려 돌아가시면서 죄를 씻어 주셨기 죄사함의 교리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불교에는 피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잔치집에 가서 돼지 고기 잘 못 먹고 체하여 죽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교의 교리는 인과보응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불경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경건하게 살아간 중이 있었습니다. 그 중은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행위록을 가만히 보고 있던 대왕이 말했습니다.
<3년 징역!>
그 중은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대왕님! 나는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3년 징역입니까?>
염라 대왕이 말했습니다.
<정말 자네같이 죄 안 짓고 깨끗하게 살아간 사람도 보기 드물지. 그런데 이리 와 보게. XX년 X월 X일 자네가 밀밭을 지나가고 있었어. 배가 고팠지. 그래서 밀이삭을 잘랐어. 비벼 먹으려고 하다가 ‘이것도 죄지. 남이 농사지은 것을 훔쳐 먹는 것이지’ 그리고 손을 털었어. 그런데 그 때 자네 손에 땀이 나서 3알이 묻어 갔네. 그래서 3년 징역이야.>
불교도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과보응입니다. 어느 불교 교실에서 학생이 공부하다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개를 죽이면 개로 태어나고, 토끼를 죽이면 토끼로 태어나는 것이 인과보응인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면 사람으로 태어나나요?>
선생님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불교는 정확하게 인과보응입니다. 피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사함의 능력입니다.
아무리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잘 하여도 죄는 닦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사가 수술을 잘 하여도 죄를 도려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페인트 칠을 잘 하여도 죄를 페인트 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하여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십자가만이 죄사함으 줄 수 있습니다.

3. 병고침 능력

십자가의 도는 병고침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만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병까지 짊어지셨다고 마태복음 8장 17절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병고침의 능력이 있습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배낭에 책 두 권은 꼭 넣고 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여동생이 불치병 안질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동생 눈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파스칼은 기도를 마치고 동생을 찾아가서 눈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동생이 말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눈이 방금 나았어요>
이 때 파스칼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파스칼이 죽은 후에 옷에서 이상한 가죽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옷깃마다 가죽에 이 말을 적어 놓고 그 것을 넣고 다녔음이 발견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12년 동안 혈루증을 고생하며 있던 것을 다 허비하고, 의사들을 다 만나 보았어도 더 심해만 가던 병자가 예수님의 옷 자락을 잡았을 때 고침받았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4. 부활의 능력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3일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가운데 가장 큰 능력은 역시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월남 전쟁때에 월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집에 돌아 와 보니 집이 불타버렸습니다. 폭격으로 쑥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리 저리 찾아 보았습니다. 뼈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내도 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정말 아내와 아들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마약으로 나날을 지내며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뼈조각을 날마다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저 돌아 왔어요.>
알콜 중독이 되어 있는 아버지는 그 청년에게 돌을 던지면서 말했습니다.
<나쁜 놈! 슬픈 사람을 더 슬프게 놀리냐? 내 아들은 죽었어.>
그러나 그 청년은 진짜 아들이었습니다. 그 날 폭격을 받고 다 죽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몇 달 동안 치료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뼈조각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죽었다고 단정하고 살아있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아버지인가요?
십자가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나는 이대를 세우신 김 활란 박사님과 농어촌 선교를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회를 같이 드린 적이 여러번입니다. 그 때마다 김 박사님이 친히 피아노를 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김 활란 박사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 그러니 장례식이라고 말하지 말고 환송식이라고 불러라.>
그래서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환송식을 하였습니다. 부활은 장례식을 환송식으로 바꾼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네 가지 능력입니다.
1. 죄를 보는 능력
2. 죄사함받는 능력
3. 신유 능력
4. 부활의 능력

다시 한번 외치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강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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