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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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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병사들이 개선 행진을 하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행진이 시작될 때까지 병사들은 로마 성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성 밖에서 수십 일 혹은 수 개월을 머물면서 완벽하게 행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10월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군에서 뽑힌 병력들이 몇 달 동안 합숙하며 행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여간 로마 병사들의 개선 행진은 병사들에게 있어서 매우 영광스러운 행사였습니다.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기쁘고 즐거운 잔치와 같은 행사였습니다. 백마를 타고 늠늠한 모습으로 개선 장군이 앞장 서서 행진해 들어올 때 로마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병사들이 승리의 영광을 로마 시민들과 또한 신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예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박수 갈채를 보내면서 환영하는 것은 로마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습니다. 그 규모에 있어서도 그렇고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아마도 시골 학교의 가장 행렬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나귀 새끼에게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사람을 태우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등에 태운 사람을 떨어뜨리고 싶어서 담벽 같은 곳에 몸을 부딪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뒷발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타신 그 나귀 새끼의 등에는 안장도 없었습니다. 물론 멋진 장식도 없었을 것입니다. 경호원 같은 것도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나귀 새끼의 등에는 다만 허름한 옷이 덮여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이 행진하는 길에는 붉은 카펫이 깔렸고 또 그 주변에 아름다운 꽃들과 여러 깃발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 큰 기대를 건 열렬한 지지자들이 카펫 대신에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았을 뿐입니다.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들도 별로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선 행진 치고는 너무 초라해서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은 근처에서 꺾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이 생각나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너무 초라한 행렬이고 차라리 감추고 싶은 그런 모습이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바로 이 사건이 오고오는 세대 속에서 계속해서 읽혀지고 기억되고 또다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두 이 사건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종려 주일이 되면 온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읽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그 초라한 행렬을 재연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사건은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등극하시는 승리의 입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이 땅에 참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의 등극이었습니다. 전쟁 영웅들의 멋진 개선 행진이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참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순간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대할 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협력자, 혹은 협력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귀 새끼의 주인이 순순히 내어놓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예수님을 믿는 익명의 제자였는지 성경에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드린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나름대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라는 말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많이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주’ 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사뭇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고백하는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삶, 나의 소유,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 주인으로 믿는 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성숙한 교회인 것입니다. 평화의 왕, 영광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예수님께 나귀 새끼의 주인은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드렸습니다. 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리지 않았습니까?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계획도 접었습니다. 자신의 욕심도 접었습니다. 그리고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나귀 새끼의 주인은 바로 그런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면 다 두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잠시 빌려 쓰다가 갈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을 놔두고 가는 부자를 가리켜서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눅 12:16~21)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익명의 제자는 그 점에 있어서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고백되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영광스러운 승리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그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별로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자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코 충성스러운 헌신자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다른 것을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주인은 아직도 자기 자신들이었을 것이며, 그들의 관심사는 다만 세상의 재물과 명성과 권세와 지위를 얻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 건강한 교회들이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생명을 가진 교회이기 때문에 건강해야 합니다. 교회가 건강해야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건강한 교회는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윌로우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는 매우 건강한 교회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이 건강한 교회라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늘 점검하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바로 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때마다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찬양하고 있는가?” “성장을 위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있는가?” “계속적인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진정으로 헌신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침내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순교자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큰 상이 예비되어 있을 것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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