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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마음 (빌 2:5-11,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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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상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두 가지 서로 상반된 반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제 예수께서 왕이 되실 것이라고 하는 벅찬 기대였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자리 청탁까지 하였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 행이 바로 영광으로 통하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몇 차례 말씀하셨듯이 예루살렘 행이 고난의 길이라고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니까 제자들이 매우 꺼려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죽이려고 하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고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반응과는 달리 예루살렘 행이 고난이 기다리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적진을 향하여 돌진해 나아가는 군인처럼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눅9:51에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이미 확고하게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몸을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셨습니다.

이래서 마침내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로서는 이 예루살렘 입성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시후면 저 "호산나"소리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바뀔 것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엄청난 환영의 물결만 보고 그냥 신바람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이 길이 십자가로 통하는 길임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또 확실하게 아시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본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영광을 기대한 제자들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둘 다 불완전한 신앙양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통해야 부활의 영광에 이른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하나의 코메디 같은 장면입니다. 승리의 왕이라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준마를 타야합니다. 그런데 말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발은 땅에 닿았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온통 왕으로 환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도 참 웃기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일은 자기나 남이 그렇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참으로 높여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빌라도에게 말씀했듯이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다"고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우리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종려 주일 우리가 가져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구약 사50:에는 저 유명한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에는 그 고난의 종이 어떻게 영광의 왕이 되셨는가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그 고난의 종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빌립보서 2장을 중심으로 보여 주시는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아니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1.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체"라고 하는 말은 변할 수 없는 본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그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영원부터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오, 지금도 우주 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셔야 할 그분이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우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비우셨다는 것은 마땅히 내가 가져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포기한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포기"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자주 정치인들이 "마음을 비웠다"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 가운데 정말 자기 마음을 비운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반대로 항상 무엇인가 채우고 싶은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채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는 항상 싸움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를 믿는 오늘 우리들은 어떤 마음,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 주님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본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항상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 살라고 하십니다.

2.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우리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좋은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진 재물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위가 높다든지 명예를 가진 것도 훌륭한 자랑거리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단지 자랑거리 정도가 아니라 출세를 위한 필수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자랑거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도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자랑거리가 한갓 휴지조각만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우리 면류관은 완전히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자랑거리를 앞세워 얼마나 과시합니까? 얼마나 잘난 체 합니까? 얼마나 형제를 멸시하고 무시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그분은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자라나시기를 갈릴리 나사렛 시골에서 가난하기 짝이 없는 요셉과 마리아의 집에서 비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를 일컬어 메시아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무시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냐 그 아무개 아무개 아들이 아니며 아무개 형제가 아니냐?"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미리 예언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 주님의 낮아지신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셔서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겸손입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주님이 낮아지시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낮아 지셨기 때문에 내가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은 모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높아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남을 짓밟고라도 내가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세상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마저도 주님의 길이 아니라 사탄의 길에 익숙해 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그스틴을 찾아가서 기독교 제 일의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그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덕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그스틴은 "두 번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번 더 물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어그스틴은 "세 번째도 역시 겸손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께 배우고 본 받아야 할 마음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고 했습니다.

3. 우리가 배우고 본 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말씀이 어떻게 응하겠느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한가지한가지 일을 하실 적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기도야말로 이러한 주님의 순종을 보여주는 극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옛날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별명이 "아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아멘 밖에 모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 복종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타락이었고 멸망의 길이었다면 우리 주님의 순종이 우리 구원이 되었고 우리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 받지 않은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서머나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죽도록 충성했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순종한 교회란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도 역시 사람들이 모인 교회인데 허물이 없겠습니까? 부족한 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주님께 아멘 하고 복종하는 교회였을 때 다른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주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의 원리가 오히려 이 세상 삶의 법칙입니다. 여기 공멸 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라 하시므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 자기를 비우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 죽기까지 복종하는 주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여기 생명과 은혜와 축복의 놀라운 세계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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