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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억지로 진 십자가 (눅 2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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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약 30여 년이 지난 후 베드로는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타나자 시몬의 마술이 전혀 엉터리라는 것이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에는 마술사 시몬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불륜을 지적했다가 목베임을 당했듯이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알비누스 부인의 순결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황제와 알비누스 부인은 대노하여 베드로를 죽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 교회는 베드로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계속 지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한 베드로가 마침내 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로마를 떠나 도망을 가는데 우리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로마로 가시는데 자기는 로마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진하게 체험해야 하는 이 종려 주일, 고난 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에 대하여 상고할 이유가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막15:21에 보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진해서,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으나 구레네 시몬은 전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징발 당하다시피 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크신 뜻은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1.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1) 그것은 당시 극악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거기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사형 틀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거기 못 박아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순교를 가르칩니다.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부의 말처럼 그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3) 십자가는 우리가 신앙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할 때 마침내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도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4)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대속을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나라 영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만을 지고 따를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것도 맨 처음 십자가를 지고 따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치던 다른 제자들은 어디가고 주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날 이 구레네 시몬은 몹시 언짢았을 것입니다. 매우 불행한 하루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해서 억지로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그와 그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이 맡겨 주신 사역을 위하여 즐겨 십자가를 지면 더 큰복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큰복이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2)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기 때문에 그 은총의 현장을 친히 목격하고 체험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우리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묵묵히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면서 오히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거룩한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회개한 강도에게는 천국을 약속해 주시고, 울고 서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는 요한에게 그 장래를 부탁하는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마침내 "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총의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아! 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 구주로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온 가족들에 그 놀라운 말씀을 증거하고 모두 함께 믿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롬16:13에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루포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서 그와 그 어머니가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과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억지로라도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와 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3)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렸을 때 혹 병이 나면 가루약을 엄마 젖에 타서 먹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마시지만 그 맛을 보고 나면 다음부터는 숫가락만 얼씬하면 애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갑니다. 그래도 약은 먹여야 하니까 둘이서 붙잡고 씨름을 하면서 먹입니다. 애들은 발버둥을 치면서 거부합니다. 왜 부모들은 그런 강제를 합니까? 그 약을 먹여야 애들 병이 났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처음에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왜 억지로 졌겠습니까? 오히려 십자가가 자기에게 돌아왔다고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숨겨진 엄청난 은혜와 복을 보는 눈이 열리기 전까지 그것은 원망거리요 불평거리였습니다.

옛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애굽에 가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바로를 향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바로의 심기만 자극하여 몇 배나 더 심한 노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원망하면서 돌로 쳐죽이려고 까지 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하고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십자가를 통하여 모세를 능하게 쓰셨고, 마침내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해방이라고 하는 놀라운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요나는 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가당치도 않게 여겨져서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다시스는 성공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좋은 조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 집니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돌아간 십자가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시스행을 막으셨습니까? 왜 순탄한 길을 보장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어찌 그 길을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지워주시는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즐겨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따르십시오. 거기에 주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4)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서처럼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고, 가정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부간에도 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때문에 직장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입니다. 오늘 이 민족은 아직도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에 내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일수도 있고, 그것이 전도일수도 있고, 충성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지고 가야할 몫은 내가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십자가를 찬양하기는 좋아하고, 바라보기는 좋아하고, 목에 걸고 다니기는 좋아하지만 그것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즐겨지면 더 큰 축복이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거기 놀라운 은총과 복이 있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옛 성도의 십자가 노래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여 오늘은 비가 옵니다 / 비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산이 무너져 길이 막히고 / 다리가 끊어져 건널 길 없어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바람이 붑니다 / 바람 부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물결은 노하여 하늘을 찌르고 / 가 없은 바다에 파선을 하여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눈이 옵니다 / 눈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갈 길은 만리요 또 아득하고 / 눈보라 몰아와 앞길을 막아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오늘은 죽음이 옵니다 / 죽음이 오는 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앞에는 칼이 가로막히고 / 뒤에는 총이 위협하여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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