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그가 찔림은 ....(사 53:4-6)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오늘은 교회절기로 따지면 종려 주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길에 옷자락을 깔고 종려 나무 가지를 꺽어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 할지어다”라고 환영하며 영접하였기 때문에 종려 가지로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려 주일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셔서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을 까지를 고난 주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 바로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면서 우셨습니다.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호산나 하면서 환영하였습니다. 
 
  월요일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아 내시며 “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거늘 강도의 소굴을 만드셨다” 책망하셨습니다. 월요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심으로 성전을 청결케하셨기에 월요일을 권위의 날이라고 합니다. 

  화요일은 전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일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여러 가지 변론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공격적으로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악한 농부의 비유와 두 아들의 비유 그리고 혼인잔치 등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못 마땅히 여긴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수요일에 일어납니다. 수요일에는 예수님이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 성경에 언급이 없기 때문에 수요일은 침묵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침묵하는 대신에 사단의 활동이 왕성하여 사단은 유대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을 음모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가야할 길을 아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요일 입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스승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서로 씻겨주는 사랑의 실천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여 주시고 포도주를 따라 주시며 자신이 우리를 위해 주시는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길을 떠나기 앞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목요일은 준비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신후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혼 힘을 쏟아 기도하셨습니다. 인류의 죄악을 씻기위해 자신이 마셔야 할 쓴잔과 져야할 십자가의 고통앞에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던 제자 한사람에게 배반 당하시고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어 결박된 채 산헤드린 공회와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 당하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채찍에 맞고 군중들에게 침뱉음을 당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결박 당하시고 죽기까지가 금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금요일을 고난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빌라도가 이런 말로 예수님을 심문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면 왜 이렇게 끌려 왔으며 왜 이런 고난을 받느냐 하는 조금은 조롱섞인 투의 심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말뜻을 간파하셨지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눅 23: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그렇습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말에 로마 황제의 대리자였던 빌라도 총독이 이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밝혀 말했습니다.
  사 53:4-5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계속 강조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나도 되고 너도 되는 말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신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사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어리석고 약하고 무능한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잘못 간 존재들입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 값을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엉뚱한 대상에게 그 죄 값을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 값을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어깨에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들어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님의  어깨에 얹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런 하나님을 만나 보셨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여러분의 마음이 녹아지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경험은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마음을 열어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 나도록 인도하실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은혜는 참 신비입니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여시면, 그리고 은혜를 주시면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는 축복을 누립니다.
  나의 죄를 자기 외아들 예수님의 어깨에다가 얹어 주시고,"이제 너는 됐어. 나는 이제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사랑, 이것을 때와 장소의  구별 없이 늘 마음에 담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는 우리 대신 찔렸습니다.
  찔렸다는 말은 상처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대신하여 채찍에 맞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맞아야 될 매를 대신 맞으시고 상처를 받으셔서, 우리가 당해야 될 그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600여 년 전에 벌써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찔린다'는 이 용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밝혀 주신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시에 찔렸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찔렸습니다. 몸도 상했고 마음도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찔리심으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공포에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상처투성이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제멋대로 사느라고 사 1:6절의 말씀처럼 상처뿐인 인생이 되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내 욕심대로 살다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랑 받겠다고 욕심 부리다가 결국 커다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가슴이 뻥뻥  뚫려서 구멍 투성이입니다. 다 상처 입은 존재들입니다.
  이 상처가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다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15절을 적어 놓으시고 집에 가서 꼭  읽어보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내가 빚진 자인 줄 몰랐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내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 이 죽을 죄인이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고, 죽을 죄인이 예수님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빚을 진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요,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받지 않아도 될 징벌을 받았습니다.
  당하지 않아도 될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모두 제길로 나가서 상처받고 죄악의 짐을 짊어진 우리 때문입니다. 그의 찔리심으로 우리의 상처가 나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고난의 한 주간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힘쓰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박재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