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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 길을 당신도 가시겠습니까? (마 2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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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의 힘의 끝이 곧 하나님의 능력의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은 어떤 고난과 절망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잔잔한 날이 없듯이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사는 것이 끝없는 고난의 연속이고, 어떤 때는 슬픔의 광장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쪽에서 불티가 한번 일어났는가 싶어서 그것을 잠재우면, 또 다시 저쪽에서 불티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절벽 위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맑은 날과 비오는 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 평생을 살면서 인생에 다가오는 평안의 날과 슬픔의 날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때로는 슬픔이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수레바퀴에 여지없이 짓밟히며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밤을 세워 울고 또 울어도 다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극한 슬픔의 상황에서 마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헤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위로와 격려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있는 곳에는 고통의 문제가 그림자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삶의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를 우리가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대응책을 주님 안에서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란 단 한번의 사건으로 판가름이 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단 한번의 사건이나 경험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스스로도 한번의 실수나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는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길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은 실패와 실의와 번민과 불티가 날아오는 것 같은 인생의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반발하지도 않았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목사인 저는 이런 모습을 얼마든지 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심령에 큰 고통을 느끼고 잠도 못 잡니다.  얼굴에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근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마음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환경을 저주합니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혼자 하늘이 무너지듯 깊은 한숨만 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도전의 기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있음을 믿으십시오.  고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도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 사실을 믿는다면 환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지 말고 오직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고 온전히 예수를 믿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펄펄 뛰며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 찬송하며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아십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인도를 찾고 기다리는 가장 순수한 생명의 작업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인도만을 기다리며 가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이 진리를 경험하고 깨달았던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신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마음에 드는 자를 일평생 책임지고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집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인생의 모든 좌절감도, 불안감도, 고독감도, 원망도, 공허감도,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으로 치유함을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산을 옮길 믿음을 다시 붙들고 자기의 나약성을 깨십시오.  역사하는 믿음을 붙들고 굳어져 가는 자기 마음을 두드려 깨십시오.

모름지기 사람에게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가 빠지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기를 빼지 마십시오.  아내의 기를 꺽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세상 속에서 기가 다 빠졌다고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집에서 하늘의 기가 여러분의 심령과 골수를 가득 채우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여호와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인격이나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인격이 좋고 자질이 좋아도 영적인 권세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세움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에게는 임명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종이다'라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는 임명장 하나를 써 주시면 참으로 좋겠는데, 그 흔한 임명장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임명장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이라는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어둠의 영들이 두려워하는 하늘의 영적 권세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하늘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영적 권세를 갑절로 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강한 하늘의 영적 권세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신부 한 분이 맨하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으슥한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몸에 지닌 것은 모두 다 내놔!"
주머니를 뒤져봤더니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지갑도 두고 왔고,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담배 한 갑을 내밀었습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도가 아주 한심하다는 투로 한 마디를 합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사순절 기간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강도짓을 하지만 사순절 기간에는 술이나 담배를 먹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할 사순절의 마지막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흠도 없고 티도 없으신 주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의 길로 올라가셨습니다.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주님의 사랑에 매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능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진정한 행복자였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예수를 믿는 믿음 하나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길을 거부하지 않는 이 시대의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설교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제 이야기는 함경북도에서 당간부 전용 물자 공급소장을 지내다가 1985년에 경찰간부의 뇌물 요구를 거절한 뒤 정치범으로 몰려 인민재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평남 개천 교화소에서 1992년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가 1994년 아들과 함께 중국을 거쳐 탈북에 성공한 이순옥 씨가 프랑스의 인권단체 리베르테 초청으로 파리에서 라디오 프랑스 엥테르의 공개 방송에 출연해서 밝힌 증언입니다.

"교화소에서 인간 이순옥이 아니라 꼬리 없는 짐승 832번으로, 오전 5시에 기상해서 밤 12시까지 노동했고, 화장실은 하루 3번 밖에 갈 수 없었고,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 추위에 떠는 '동태 고문'으로 동상에 걸려 열 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던 그녀는 북한수용소의 참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탈북자 이순옥씨의 프랑스 라디오 증언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19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 날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이 수용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나 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여섯 시간, 열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의 용광로에서 일하는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뒤 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 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시간이었는데 제가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공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 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 소리 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 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그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나님이, 진짜로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 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 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나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 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놀랐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내 몸이 어그러져도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아이와 내 가족들이 예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래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오늘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놀라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혹여 십자가가 없는 영광만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십자가가 없다면 영광도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신학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서들을 보면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에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실 때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성령을 체험한 이후에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누구든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여러분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평생 주님이 걸어가셨던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과 어둠이 세력들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우리의 환경이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주를 향한 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능욕을 받을 때에 내 믿음이 오히려 더 강하여지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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