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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왕으로 오시는 주 (마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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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곡가인 헨델이 몸이 약해져 음악활동을 못하게 되어 빚을 지게 됩니다. 빚을 갚지 못하자 사람들의 고소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헨델은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때 작곡한 곡이 유명한 '메시야' 입니다. 그 대곡을 쓰고서 헨델은 얼마나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눈물 자국이 원 악보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헨델은 건강이 더욱 나빠져 급기야 눈을 실명하고 맙니다. 그는 마지막 죽기 직전의 고난주간에 메시야를 직접 지휘하고 그 다음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메시야 곡의 후렴 중 반복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가 다스리신다 그가 다스리신다 만왕의 왕 그가 다스리신다" 입니다. '다스리신다' 는 말이 무려 43번이나 곡 중에 반복됩니다. 주님은 왕으로 오시며,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는 곡의 의미입니다. 일제 시대 때에 일본의 잔혹성은 대단했습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만왕의 왕' 이란 가사가 나오면 못 부르게 하고 아예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의 천황만이 왕이며 예수는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제자들과 나귀의 주인을 통해, 예수께서 왕 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왕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할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머리로 이해되기 때문에 납득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종된 우리기에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나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지러 오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수께서 왕 되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고 예수께서 왕으로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예언의 말씀을 스스로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왕으로 오시는 예수를 예루살렘의 무리들처럼 기쁨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왕으로 오시는 주님께,

첫째로 아낌없는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60년대 종로의 피보약국은 피부약 전문치료 조제약국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김광석사장은 조제약을 다른 약국에 판매한 혐의로 8억3천만의 벌금형을 받고 사찰로 도피하게 됩니다. 당시 불교인이었던 김광석사장은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수하여 복역을 마친 후 소망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 영감을 받아 만든 화장품이 바로 "참존 화장품" 입니다. 사업이 자리 잡기 전에 곽선희 목사님은 김사장을 불러 미 프린스톤 신학대학에 한국인 상담 석좌교수가 있어야 하는데 기금 100만달러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이때 김광석사장은 본문 2절과 3절을 눈물로 말하고 나서 대답합니다. "목사님,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주님은 물질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100만달러를 준비한다 안한다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즉시 100만달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 후 김사장은 믿고 순종했더니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후 장로가 된 김광석사장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는 책 속에서 고백합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온통 감사뿐입니다. '내가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정을 하면 몸이 오싹해집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한없이 공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기쁨은 움켜쥐면 쥘수록 허무합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내 젊은 시절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합니다. 착한 종은 항상 주인의 말에 기쁘게 복종합니다. 제 삶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본문 3절에 "주가 쓰시겠다 하라" 고 했을 때 나귀주인은 두말하지 아니하고 헌신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예수님과 나귀 주인과의 관계는 이미 사랑과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주저 없이 요청할 수 있었고, 나귀 주인 역시 기쁨으로 순종하여 나귀를 내어 드린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존경했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금번 종려주일에 예수께서 이런 자들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 하는 데 시간을 끌 필요가 없습니다. 2절의 말씀처럼 즉시 풀어서 우리의 나귀들을 예수님께 끌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왕으로 오신 주님께 헌신하는 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존심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19세기 철혈재상이라고 불려진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하나로 통일하는 큰 위업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독일 황제 빌헬름이 축하연을 베풀고 흐뭇한 표정으로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나 빌헬름 황제를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신하들은 저마다 200억 마르크, 500억 마르크, 1000억, 5000억 마르크 등으로 계속 더 올려 대답합니다. 그런데 일등공신 비스마르크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나를 얼마로 평가하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29 마르크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에 황제이하 모두가 다 놀랐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한 말의 뜻은 예수께서 은 30에 팔렸으니 거기서 하나를 감해서 29마르크로 평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예수보다 더 귀하거나 값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서 부질없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태운 새끼 나귀는 주님이 가자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가 났지만 우쭐대거나 잘난 체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만큼 살면서 주님만 나타내고 그 사명이 끝나면 조용히 모습을 감추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자기 겉옷을 펼치고 나뭇가지를 길에 펴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겉옷은 신분을 상징하며 자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겉옷을 드렸다는 의미는 자신의 명예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명예를 길바닥에 펴며 과연 주님을 높일 수 있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향하여 '내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는 무릎을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도마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키려 했지만 도마는 예수님 앞에서 손과 발을 확인도 안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들은 자존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존심이 신앙에 큰 방해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에 가기 싫어합니다. 바지가 구겨질 까봐서 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아멘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소리내어서 기도 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남들 앞에서 식사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자존심이 발동하고 있다면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원합니다. 왕이신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할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가 입고 있는 겉옷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10살도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의었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은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결혼한 지 13년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습니다. 재혼하여 두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10명은 어려서 죽었습니다. 남은 자녀 속에는 20살이 넘어서 잃은 아들도 있고 정신박약자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고, 뇌출혈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작곡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을 말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독실한 신자로서 세계 역사상 음악가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인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까닭은 인생의 고난을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온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살을 찢는 고난의 삶 속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으로만 살았고 그래서 불후의 명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바하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구원을 노래해야 합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호산나(Hosannas)하며 외칩니다. 9절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은 주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자이심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심을 노래한 것이며,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는 말은 주님을 메시야로서 찬양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들입니다. 예루살렘 모여있던 많은 무리들은 선지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호산나 구원의 노래를 일생 동안 불러야 합니다. 사망 권세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한, 사망 권세가 우리 가정에 있는 한, 사망 권세가 우리의 직장과 사회와 민족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같이 찬양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 되신 예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겉옷을 펴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그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드리며 구원의 노래를 불러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 기쁨을 더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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