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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천후 행복을 낳는 비결 (욥 30: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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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에 찌든 환경에서 나무가 잘 자라지 않고 잎이 죽어가는 나무가 있는 반면에 공해에도 잘 견디고 나뭇잎이 항상 푸른 상태를 유지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추위에 잘 견디는 나무와 견디지 못하는 나무, 더위와 사막에 잘 견디는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도 있습니다. 추위에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 꽃이 있고 추위에도 꽃을 잘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맑은 날에만 믿음을 유지해가는 신앙인이 있고, 반면에 폭풍 치는 험한 날의 믿음을 지니고 잘 견디어나가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새들은 미풍에서보다 강한 바람에 맛 서게 될 때 더 힘세게 난다고 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인생도 고난이 없으면 무의미하며 인간은 고난과 맛 설 때 활기를 띠게 됩니다. 고통이 불행이냐 행복이냐는 단답식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고통의 의미와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고통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폭풍 치는 험한 날의 믿음

사단이 하나님께 고소하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하나님! 사실 욥의 믿음은 별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잘 해 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요. 지금 당장 하나님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아 가면 삿대질을 하고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것입니다”하나님은 사단의 고소를 통과하는 욥의 믿음의 순수를 검증하기로 하였고 이렇게 해서 욥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욥은 단 하루 만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습니다. 욥은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위치에서, 갑자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위치로 전락합니다. 친구들과 아내까지 욥을 비판하고 교정하려고 합니다. 욥은 의롭게 산 자였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를 만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련의 시간입니다. 따뜻하고 맑은 날의 믿음이 아니라 폭풍 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순풍에 돛 단 배와 같이 잔잔한 날의 믿음이 아니라 파도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시련의 시기에도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어떤 분은 '예수 믿고 계속 승승장구 축복의 지대로만 살아왔다고' 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렇게 축복의 지대에만 두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자로만 살았다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부자가 아니면 주님께 삿대질을 하고 돌아설 정도의 믿음밖에 되지 않으니 안전의 지대에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수치입니다. 험한 세상에 나가 꿋꿋이 풍상과 역경을 헤치며 부모의 유업을 이어가는 힘찬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의 보호막 아래에만 안주하는 걱정스러운 자녀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 인생의 굴곡이 전혀 없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까? 인생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전부 저주 받은 것입니까?

이제 욥은 이런 시험대에 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도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고난의 시기에도 믿음은 꽃을 피울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검증 받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고난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 경외의 정도를 검증 받기 위해 시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욥처럼 엄청나고 특이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인간으로서 수천 년 동안 단골 품목처럼 있었던 필연적인 고통들입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단지 지금, 바로 나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암은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것이고 교통사고, 가스사고, 화재사고, 폭행사고와 같은 갑작스런 사고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제나 손쉽게 닥쳐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도, 파산, 경제적 몰락 이것도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광범하게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런 모든 불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비껴가거나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암으로 죽고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사업을 경영하는 실업가도 부도를 당하거나 파산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주 천박해 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는 끝이 없습니다. 그의 도우심의 손길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 발 딛고 살면서 당하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어서는 것,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순전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고통을 행복의 씨앗으로 바꾸는 행복한 인간

여기에 고통을 고통으로만 체험하고 끝내는 불행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고통을 행복의 씨앗으로 느끼고 바꾸는 행복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대개 두 가지로 옵니다. 소유물과 몸입니다. 물론 소유물은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으며, 재능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 고통의 순간 인간은 불행을 느낍니다. 고통이 오면 하나님 원망과 범죄의 충동에도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겸손, 간절, 정화, 의지, 단련, 희망을 진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오만, 방탕, 오염, 자존감, 쾌락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참된 행복은 고통을 통해서 옵니다. 고난을 당하면 겸손해 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나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무력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콧대가 좀 낮아지는 것입니다. 또 어려우면 간절해집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들입니다. 사람이 간절해지면 그때는 인생을 느끼는 때입니다.

폴 틸리히( Paul Tillich )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호황으로 경제가 잘 나갈 때는, 우리가 얼마나 쾌락과 안정과 욕망과 오만에 들떠 있었습니까? 이 찌꺼기와 불순물을 이제 우리 주님은 깨끗이 씻어 주시기 위해, 생명의 강가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정화와 단련입니다. 금을 제련해 내듯 불순물 찌꺼기는 다 걸러 내고 정제된 금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6)

고통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게 되니 더 겸손해 지고 더 간절해집니다. 더 불순물을 씻어내고 맑게 갠 하늘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쾌락도 보고, 욕망도 보고, 재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단순하고 선명하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벌써 축복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는, 사람들의 재잘거리고 떠드는 소리도 걱정 없는 사람들의 사치처럼 들려집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은 특별히 비통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신경한 별종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영웅적으로 이겨내는 철인도 아닙니다. 욥기서 전체를 잘 읽어보시면 욥은 하나님께 반항도 하고 질문도 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이런 것들이 막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중요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원망, 분노, 이런 아픔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어버린다면, 불행을 불행으로 마감하는 사람입니다. 사단이 원하고 고소한 대로 단물만 빨아먹는 믿음을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을 여호와 경외로 바꾸는 사람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행복의 싹을 키웁니다. 그 과정과 그 끝이 삶의 행복을 더 진하게 해 줍니다.  욥은 이런 고난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아 현실적인 축복도 받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0)그러나 이 구절을 잃는 그리스도인들은 '갑절'에만 신경을 집중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삶들의 관심은 욥이 마지막에 회복한 '재산의 갑절'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통과한 욥의 믿음의 승리를 우리는 같이 축하하고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미 욥은 고통 중에 고난을 대면하는 치열한 자세와 실천에서 벌서 승리의 싹을 키웠습니다.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사고와 불행, 재앙과 재난을 다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한 번 믿음으로 이겨본 사람은 고통을 통과하는 방법을 압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조절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뿐만 아니라, 슬픔과 노여움의 순간에도 희망의 무지개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호와 경외를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재료로 불행의 옷을 짤 것인가, 행복의 옷을 지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믿음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잘 견뎌 배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행복한 시절과 똑같이 여호와 경외를 결론적으로 도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맑은 날과 흐린 날을 관통해 행복을 캐낸 것, 이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배나 되는 재산은 덤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자세가 바르면 풍요와 평화는 덤으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구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의를 추구하고 믿음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전천후 행복을 낳는 비결입니다.

이런 행복을 캐내는 여러분에게 <타고르의 시>를 드립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하여도 겁을 내지 말게 하옵소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고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내가 싸워서 이길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너무 너무 내가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 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 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죽음을 넘는 삶: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게 되는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는 성만찬에 초대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우리의 몸속에 살고자 성만찬을 마련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만찬은 하나의 종교의식이 아니라 예수와 내가 하나 되는 사건입니다. 내 살과 피 속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살면서 내 속에 예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먹어야 사는 인간은 우주의 신비에 몸으로 참여합니다. 먹고 색이고 숨 쉼으로써 우주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우리의 몸이 떡과 포도주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주생성의 조화입니다. 쌀 한 알, 포도 한 알이 영글기 위해서는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떡 한 덩어리에 우주의 신비, 창조의 신비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의 밥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밥을 천하게 여기지만 밥은 그리스도입니다. 밥과 하늘의 일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김지하) 인간은 서로를 먹으려 합니다. 서로 이용하고 서로 누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고 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밥이 됨으로써 새 공동체를 이룹니다. 서로 하나 되는 공동체, 예수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고 이웃과 내가 하나 되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 됩니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풀 한포기의 생명이 나와 무관하지가 않습니다. 우주생명과 숨을 함께 쉽니다. 옆에 있는 작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경험합니다. 나와 작은 이웃 사이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줄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생명의 폭이 넓어질수록 자유롭게 되고 해방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만찬을 통해 해방됩니다. 자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하나님의 생명의 바다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이 땅에 나타난 그 나라의 징표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임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고 또 고대하는  축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축제인 성만찬에 참여하신 여러분! 병들고 소외되고 상처받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들과 화해하는 평화의 사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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