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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제자들 (막 14:32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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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찬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성찬을 마친 주님은 유명한 다락방 강화를 하셨습니다. 다락방 강화가 끝난 후에 예수님의 일행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했습니다.
금요일 새벽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신 예수님은 여덟 제자를 산 아래 있게 하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실 때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① 심한 통곡에서 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히 5:7). 그리고 ②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눅 22:44)과 ③ 온 힘을 기울일 때 모세혈관의 파열로 말미암아 핏방울 같은 땀(눅 22:44)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부터 밤마다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시면서 쉬셨습니다(눅 21:37). 그래서 가룟 유다도 밤마다 모이는 이 장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요 18:21).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기도하시는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Ⅰ. 잠자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4장 37절에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잤겠습니까?
여기 {한 시 동안}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과 같이 기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말합니다.

1) 육신의 연약 때문입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깊이 잠든 이유를 지적하며 말하기를 저들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막 14:10).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바쁜 일정으로 그들의 육신이 피곤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계속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지낸 관계로 그들의 육신이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시면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시므로 저들의 피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여덟 제자와는 달리 세 제자에게만 앉아서 편히 쉴 것을 명하지 아니하시고 세 번이나 깨우셨습니다. 주님이 세 번 저들을 깨우신 것은 육신의 연약을 이기라는 경고였습니다. 육신의 피곤과 연약을 이겨야 기도의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는 말씀을 더디 믿었기 때문입니다.
3복음서 기자들은 세 제자들이 기도하시는 주님과 돌을 던질만한 가까운 거리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돌을 던질만한 거리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한 거리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심각한 기도의 소리를 듣고 그 기도를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결시켜 사태의 위급함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돌던 질만큼 한 거리는 주님의 애통하시는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산악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한 밤중에도 돌던 질만큼 한 거리에서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가능한 거리입니다.

그들은 그 고통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그 애통을 십자가의 사건과 결부시켜 긴장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육신의 연약함보다는 주님의 교훈에 대한 저들의 망각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애통하시는 모습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누가는 오히려 저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예수님의 왕권의 불길한 징조에 연결시켜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눅 22:46). 이 모든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고를 전혀 믿지 않았거나 혹은 더디 믿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Ⅱ. 수(首) 제자격인 시몬 베드로까지 깨어 있지 아니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0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세 제자의 잠 중에서 특히 베드로의 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이 세 제자를 깨우심보다는 베드로를 깨우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몬에게 대한 예수님의 불만의 경고입니다. "시몬아 자느냐( )" 이 말은 직역하면 "깊이 잠들었구나 시몬아" 라고 해야 합니다.

1) 주님의 실망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여덟 제자를 잠들게 하시고 세 제자에게 기도하기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세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만 깨어 기도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연약해지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의 돕는 힘이 필요했고 피곤한 제자들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 음성은 '베드로 너까지도 잠들어 있구나'하는 탄식과 실망의 말씀이라고 많은 어떤 주석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책임을 묻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주님은 그 중에서 베드로를 깨워 시몬아 자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잠들어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잠들지 않겠느냐는 책임을 묻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다른 두 제자는 베드로의 잠든 것을 보고 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잠은 그 개인적인 잠의 경지를 넘어서 다른 제자들의 잠에 대한 책임을 주님은 지적하셨습니다.
사회적인 모든 관계에서 어떤 사건에 관한 책임은 반드시 그 단체의 수석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3) 잠을 깨우시는 말씀입니다.
시몬아 자느냐는 주님의 음성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는 헬라어의 명령사에 해당되는 의문문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사명을 맡은 베드로가 잠들어 있으면 안될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깨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여기 모인 주의 종들은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격입니다. 우리의 잠은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파죽지세로 번져갑니다. 우리교회는 교단의 정신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교회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시찰은 서울 남노회의 선임시찰입니다. 우리 노회는 교단 9개 노회의 선임노회입니다. 우리교단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명분 있는 교단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Ⅲ. 주를 배신한 제자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복음서(마 26:47-50; 막 14:43-46; 눅 22:47-49; 요 18:29)를 도배해 놓은 듯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가룟 유다가 주를 배신한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①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② 예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③ 위선자입니다(요 12:6). ④ 사단의 종입니다(요 13:2). ⑤ 애찬의 암초입니다(요 13:21). ⑥ 그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마 27:3-10).
가룟 유다의 배신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는 성경학자들의 관심(關心)이 되어 왔습니다.

1) 불신앙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의 제자로서 주를 따르며 예수님의 교훈을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어느 때는 그도 복음을 전하고 신유의 은사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가 처음부터 주를 믿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의 근본이 신앙이 아니고 불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특성은 배신입니다.

2)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의도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돈궤를 맡고 그곳에 넣는 것을 훔쳐 가는 도적이었습니다. 이런 도둑에게 이상하게 주님은 돈궤를 맡겼습니다(요 13:29). 이는 후세의 사역자들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였던 듯합니다. 그가 주를 따름은 신앙이 아니요 주를 이용하여 돈을 얻으려는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주님에 대한 이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에 이른 것입니다.

3) 인격적 결함(人格的缺陷)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아무리 불신앙의 사람이었고 돈을 사랑한다해도 인격적(人格的)으로 결함이 없었다면 최소한 이러한 배신에 이르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제자로서 인격적 결함이라는 말은 제자로서 함량미달(含量未達)이라는 말입니다.
인격적 함량미달이라는 말은 국문학에서 말하는 화용론적(話用論的)으로 널리 속용(俗用)되고 있습니다. 함량(含量)이라는 말은 함유량(含有量)의 준말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절대량을 말합니다.

예컨데 순금을 24k라고 합니다. 그리고 18k는 순금이 정확하게 2/3가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순금이 될 수 없고 18k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를 가리켜 함량미달이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의 인격의 결함은 본문에서 여러 각도로 말합니다. 그는 검과 몽치를 든 대적들을 이끌고 그의 동지들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옴으로 그의 동지들을 배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 26:49)라고 말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행위(行僞)는 주를 대적들에게 넘기기 위한 군호였습니다.
그의 위선과 거짓된 인격은 파렴치한 양심의 행위(行僞)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4) 사탄의 꾀임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선생을 배신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탄 때문입니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항상 약한 부분을 통해 침투합니다. 예수님의 무리 중에 가룟 유다가 가장 약한 것을 알고 그에게로 침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탄의 침투도 항상 동일(同一)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이미 공개한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정신이 바짝드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잡히실 때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자신에게 좋을 뻔한 배신자들이 신앙의 세계에도 많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결함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마귀가 들어와서 역사(to work)하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Ⅳ. 끝까지 함께 한 제자입니다.

1)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부자였습니다(마 27:57). 존귀한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막 15:43). 또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눅 23:50).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15:43). 특별히 본문에서 말하기를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요 19:38).
그는 감추인 의인이요 환난 날에 주님을 사랑하는 담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요 19:38). 예수님의 장사를 앞에 놓고 예수님 생전에 한다는 제자들은 다 어디 가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까? 그는 단호히 빌라도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매장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환난 날은 배신자들을 구경하는 시대이지만 저렇게도 숨어 있는 충성된 성도들을 구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합니다. 그가 저렇게 죽은 예수를 사랑한 것을 보니 살아계실 때 예수를 사랑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동산 안에 있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백설이 만건곤 할 때 독야 청청한 소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상가에 가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죽은 자와의 촌수를 알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2) 니고데모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에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공의회 회원입니다(요 3:1). 니고데모가 아리마대 요셉을 도와 예수의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 여기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예수를 찾아가 거듭남의 비밀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판단에 이의(異意)를 제기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침향이나 몰약은 모두 고가입니다. 그 양이 무려 100근 즉 35kg 정도면 왕족의 장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행위를 감안할 때 그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곁에 없을 때 담대하게 장례를 치른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과 함께 한 자들입니다. 옛말에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고 정승의 말(馬)이 죽으면 문상객이 많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더 이상 활용가치가 없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지낸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잠자고 있는 제자들 특히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었던 수(首)제자 베드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제자로서 처음부터 함량미달이었던 가룟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사랑하고 존경해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축복받아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현인들은 인간의 사고까지도 기계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간들 삶의 통계적 수치를 절대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기준에 미달하면 그 자체를 실패로 등식화시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吾十有五而志千學 나는 열 다섯 살에 배움을 두었고
三十而立 서른 살에 뜻이 섰고
四十而不惑 마흔 살에 미혹되이 흔들림이 없었고
五十而知天命 쉰 살에 하늘의 명을 알고
六十而耳順 예순에 귀가 거슬림이 없고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일흔 살에 내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나름대로의 인생의 여정을 정돈했다는데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공자가 터득한 인생의 사이클을 초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자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 멘 -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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